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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모던

by neofluctus 2024. 2. 1.

지은이 한석정은 사회학자이면서 현재 동아대학교 총장으로 재직중이다. 2016년 3월에 초판이 나왔다. 읽는 내내 이 책이 얼마나 탄탄한 내용과 구성으로 쓰였는지 느낄 수 있었다. 독서 내내 그가 선택하는 어휘와 역사, 철학, 사회학을 종횡으로 넘나드는 박식과 숙성된 지식 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전쟁 직후 국민소득 $100에 불과하던 한국이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지에 대해 대단히 설득력있는 분석과 논거를 제시하고 있다. 사실, 한국의 눈부신 성장은 세계사적으로 너무나 예외적인 발전과정이라 외부 세계에서는 驚異(경이)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지만 정작 한국 사회 내부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스스로에 대한 과소평가를 넘어 때로 정신적 異常(이상) 내지 퇴행이라 평가할 수 밖에 없는 자기 부정 내지 자기 학대처럼 보이는 행태를 적지 않게 관찰하게 된다.

마크 트웨인은 사람들에게 “속고 있다고 진실을 알리는 것보다 그들을 기만하고 이용하는 것이 더 쉽다”고 했다. 

19새기 서구 제국주의는 산업혁명의 성과를 등에 업고 압도적인 지배력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을 지배해 나갔다. 그런데 이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한 대응 방식은 크게 두가지로 갈렸던 것 같다. 하나는 반제국주의를 외치며 외부와 벽을 쌓고 자급자족적 폐쇄경제를 이루는 사회주의적 선택과 다른 하나는 후발 주자로서 선진경제로부터의 모멸감을 견디며 그들을 열심히 학습, 모방하며 추격하는 형태였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식민지 피침략 국가들은 反帝(반제)를 외치며 첫번째 사회주의적 발전 경로를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 조류였다. 그런데,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후발 자본주의 발전 모델을 따라가며 근대화에 성공한 국가가 출현하기도 했다. 

그 후발자본주의의 대표적 국가는 1870년경에 통일 국가를 이룬 독일과 이탈리아에 해당한다. 그리고 북군의 승리로 끝난 남북전쟁도 또 다른 의미의 통일전쟁이라 한다면 미국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영국은 자신의 압도적인 군사, 기술, 금융, 제조업 능력 등을 배경으로 전세계에 자유무역을 제창했다. 이들 후발자본주의 국가들은 영국이라는 선진경제를 따라 잡기 위해서 시장의 힘보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 자본주의적 발전을 도모하는 국가 중심의 발전 경로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특히, 독일의 발전 모델을 차용한 것이 비유럽 유색인종 국가 일본이었다. 

이것은 지난 번 읽었던 ‘아시아의 힘’,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같은 책에서 확인했던 것과 같이 ‘프리드리히 리스트’와 같은 경제학자가 주장했던 개발경제학의 논리에 부응한다. 그런데, 단순히 보호주의와 같은 무역정책 뿐만 아니라 교통, 교육, 환경, 위생, 문화 등 전분야에 걸쳐 국가가 그 발전을 기획하고 추진하는 강력한 실행력을 발휘하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서 모던Modern이란 표현은 계몽주의적 근대성을 말한다. 그런데, 이 근대적 이성을 실현하는 주체가 부르조아와 같은 시민계급이 아니라 국가가 되어 서구의 발전을 모방, 이식, 변용, 체현, 발전시키는 전 과정을 모던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일본은 서구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한 대응으로 메이지 유신이라는 혁명적 변혁을 통해 사회의 체질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마침내, 타이완, 조선, 만주와 같은 식민지를 운영하게 된다. 나는 메이지 유신이 프랑스 혁명에서 나폴레옹 쿠데타의 연장 선상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은 근대 역사에서 가장 성공한 쿠데타라고 생각하며 이후 제3세계 각국에서 청년 장교들이 쿠데타를 모의할 때마다 그들이 생각하는 혁명의 ‘典範(전범)’이 되었을 것이란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하게 된다.

아무튼, 이 책에서 주목하는 것은 일본의 세번 째 식민지 경영의 경험에 해당하는 ‘만주국’의 근대화다. 경험이 쌓일 수록 시행착오는 줄어들고 만주국에서 젊은 군인들이 가지고 있던 이상을 더욱 효과적으로 속도있게 진행시킬 수 있었다. 본국에서는 기존의 기득권 세력에 의해 고착화된 사회질서 때문에 불가능했던 개혁 정책이 많았지만 만주에서는 그런 장애물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품고 있었던 원대한 계획을 마음껏 진행 시킬 수 있었다. “빨리 빨리”, “하면 된다”, “불도저 식 밀어 붙이기”의 원조는 바로 만주국에서 연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을 점령했던 미군정의 엘리트 장교들이 본국 미국에서 보다 더 자유 민주주의적 정체를 일본에 확산시키려 했던 시도와 대단히 유사하다.)

식민지 조선 사람들이 만주로의 이민이 급증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가뭄, 수해 등으로 인한 자연재난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들 만주에 정착한 조선인들은 대부분 농사를 지었지만 때로 포주로, 장사로, 그리고 일부는 만주국의 중, 하급 관리로 일을 하게 된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만주 웨스턴이라는 판타지가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동만주에서의 독립운동과 별개로 만주에서 대부분의 조선인들의 삶은 가난하고 고단했으며 비적들 뿐만 아니라 다수의 중국인들로부터 차별과 학대를 받았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에게 기회의 땅이기도 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저자 한석정은 이들 만주의 경험자들이 해방 후 한국이라는 신생 국가 건설에 중요한 인적 자원이 되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이승만 정권 하에서 이종찬 등과 같은 일본 육사 출신들에 비해 보다 고분고분했던 만주 군관학교 출신들이 군부 등에 중용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하이라이트는 박정희의 쿠데타 이후의 역사적 전개과정일 것이다. 무엇보다 이승만, 조봉암 등에 의해 실시된 토지개혁으로 이들 쿠데타 세력은 만주에서의 실험을 남한 사회에 모방, 이식, 변용, 발전시키는 커다란 장애가 없었다.

한국 록음악의 시조라 일컬어지는 ‘신중현’씨 역시 일본인 모친을 가진 만주 출신이라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경부고속도로의 건설, 포항제철, 월남파병, 산림녹화, 통일벼와 식량자급, 새마을운동, 중화학 공업 육성, 10월 유신 등 한국 현대사를 규정짓는 수 많은 내용과 사건들이 주마등 처럼 흐르게 된다.

총론적으로, 이 책은 ‘역사 사회학’이라는 익숙치 않은 학문의 영역에 속하는 저술이다. 그리고 사회학자가 본 한국 역사의 ‘식민지 근대화론’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 같다. 21세기 자칭, 타칭 선진국이라 일컬어 지는 한국 사회에서 식민지 경험을 ‘반일’이라고 하는 선악, 흑백의 이분법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기에 역사적, 시대적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라고 파악된다. 

돌이켜 보면, 경부고속도로를 건설 할 때도 월남파병 등 역사적 사회적 분기점에 해당하는 정책 결정이 있을 때마다 야당을 비롯해 많은 지식인들이 비판을 하고 그 무용성과 해악을 지적했지만 돌이켜 보면 그런 도전과 경험이 없었다고 한다면 오늘날의 한국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한 개인의 인격과 삶이 완전할 수 없듯이 모든 사회는 모두 불완전하고 나름의 모순과 문제점을 안고 있게 마련이다. 개인의 발달이 수많은 미숙함과 과오의 수정를 거쳐 성장, 성숙하듯이 우리 나라가 발전해 왔던 과정을 좀 더 따뜻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으면 좋겠다.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엄격한 시선으로, 날 선 시선으로 비판하기보다 좀 더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완고함을 누르면서 우리 민족의 성취를 격려하고 보듬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