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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클래식 음악

음악가, 장 자크 루소

by neofluctus 2024. 1. 21.

사회 사상가로서 알려진 자크 루소가 음악가 또는 음악 이론가로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

우선, 음악 이론가로서 그는 18세기의 프랑스 계몽주의 서물의 결정체라고도 말할 있는 백과사전(Diderot’s and d'Alembert’s Encyclopédie)에서의 음악 부분을 모두 집필했다. 백과사전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그것과는 다르게 시대 진보적 혁신적 사상의 집약체였다. 종교적 도그마에서 벗어나 경험과 이성에 기반한 구체적 사실을 바탕으로 구체제를 비판하고자 했던 시대정신이 그대로 응축되어 있는 혁명적 不穩(불온) 서적이었다. 

자크 루소는 스위스 제네바의 부유한 시계 비지니스를 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상류 계급 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 캘비니즘의 금욕적 윤리가 강했던 도시에서 농부 아낙의 옷을 입고 극장을 출입하며 유부남이었던 배우와 스캔들이 나기도 했던 자유 분방하고 대담한 여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혼 , 자크를 낳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다. 그래서, 자크는 Suzzane이라고 하는 고모에 의해서 키워진다. 그녀는 음악을 대단히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그의 음악적 소양은 그녀가 만들어 것이었다. 자크 루소는 그의 음악적 재능은 수잔 고모가 것이라고 거듭 감사를 표현한다.

그가 작곡한 작품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오페라 Le Devin du Village(점쟁이 마을: Le Devin은 금속이나 물을 찾는 능력이 있는 사람) 것이다. 물론, 한국 사람들에게는 마저도 익숙하지 않겠지만 당대에는 가장 성공적이었던 작품이었다고 한다. 유럽 클래식 음악 방송에서는 간혹 음악을 틀어주곤 한다. 일반적으로 그의 음악은 후기 바로크와 초기 고전 음악에 걸쳐 있다고 평가하는 하다. 

자크 루소는 음악을 수학적으로 연구하고 이해하려 했던 같다. 그래서 파리 음악 당국에 음표 대신에 숫자와 기호 등을 활용한 그대로 획기적인 악보 등을 제안하며 일자리를 구하기도 했다. 물론, 제안이 거절되기는 했지만 참신한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격려를 하며 계속적인 연구를 권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음악에 있어서 무엇보다 그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프랑스 작곡가 Jean-Philippe Rameau 음악 이론 논쟁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리고 간단하게 고전 음악과 낭만주의 음악을 구분하는 가장 특징을 두사람의 논쟁에서 찾을 있다. 당대의 중요한 음악 이론가 필립 라모는 和音(화음) 중요하다고 생각한 반면 루소는 작곡가의 의도를 반영하는 멜로디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고전음악과 낭만주의 음악을화음멜로디라는 구도로 설명하면 클래식 음악의 초심자는 윤곽을 쉽게 파악할 있게 된다.

화음은 일종의 수학적 공식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같다. 나아가 다성음악(polyphony) 和聲(화성)이라는 기본적 요소에 바탕해 발전시킨 후가Fuga라던가 소나타Sonata 같은 고전음악의 문법은 노틀담 대성당과 같은 건축물의 설계도와 같은 것이라 연상하면 맥락을 이해할 있을 같다. 한편, 이성 만능의 시대는 역설적으로 종교적 감수성을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면서 유럽인들에게 종교적 신화적 상상력을 복원 , 복권시켜 준다. 이런 흐름에서 바그너, 스메타나, 드보르작 등의 민족주의 음악이 등장하는 배경이 된다.

자크의 여성 편력을 빼놓을 없을 같다. 진보적이라는 의미는 일정 부분 성적 데카당스와 중첩될 때가 있는 같다.

자크 루소의 최초의 戀人(연인) 마담 워렌 이라고 불리우는 Françoise-Louise de Warens이었다. 그녀는 루소보다 연상이었는데 루소가 15살이 되었을 때부터 같은 집에 살며 자크를 후원하기 시작했고 집사 등으로 고용 하기도 했다. 그가 20살이 되었을 때부터 그들의 사랑이 시작되었는데 사랑은 갓난 아기 시절에 여윈 친모에 대한 동경과 사랑이 투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를 Mama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번째 사랑은 파리에서 바느질을 하며 생계를 잇던 테레사(Therese Levasseur)였다. 그녀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을 비롯해 그녀의 다른 아이들을 고아원으로 보낸 것으로 아주 유명하다. 사후에 그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는 것처럼 당대에도 그에 대한 악평과 날선 비판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때마다 그를 공격하는 구실이 되었던 것이 바로 아이들에 대한 遺棄(유기)였다. 그는 에밀이라고 하는 교육철학에 관한 유명한 저술을 쓰기도 했기 때문에 더욱 자기 모순적 위선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테레사는 루소가 영국에서 망명 생활을 재결합하게 되며 죽을 때까지 같이 하게 된다.

젊은 시절 파리에 머물다 스위스 제네바로 돌아 부유한 지주였던 마담 에피네(Madame d’Epinay) 영지에서 머물게 되는 이때 소피라고 하는 영지의 또다른 손님이었던 젊은 여성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때의 강렬했던 경험이 소설 Julie, or the New Heloise(줄리 혹은 엘로이스)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이는 비교적 짧고 강렬한 만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