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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클래식 음악

베토벤과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by neofluctus 2024. 1. 14.

1813년 10월에 있었던 라이프지히 전투는 나폴레옹의 혁명군과 프러시아, 러시아 등의 연합군간의 대전투였다. 이는 1차 대전 이전까지 가장 큰 전투로 나폴레옹은 결정적인 패배를 한다.Battle of Leipzig  by Vladimir Moshkov from Wikipedia

베토벤이 명시적으로 나폴레옹에게 헌정했던 음악은 3 교향곡 Eroica(E major)이다. 처음 표제는보나파르트였지만 나중에 황제로의 戴冠(대관) 그의 독재적 행태 때문에에로이카Eroica’ 바꾸었다는 식의 주장이 있다. 그러나, 나폴레옹을 단지독재자운운하며 너무 쉽게 판단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자신의 인식수준을 드러내는 일이 있으니 쉽게 얘기해서는 같다. 나폴레옹이라는 역사적 존재가 없었으면 지금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개념은 실현되지 않거나 훨씬 미래의 가능성으로 남겨 두었어야 할지 모른다.

나폴레옹은 유럽에서의 혁명 전쟁을 통해 혁명의 이념을 구체적 제도로 실현시킨다. 토지개혁과 농노해방, 절대왕정 신분제 철폐, 나폴레옹 법전으로 대표되며 법치를 근간으로 하는 사법제도의 개혁, 능력에 기초한 관료선발, 효율적 관료제도를 통한 중앙집권 행정의 실현, 국민 교육제도 오늘날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민주주의적 제도를 실현시키고 그것이 가능하게 영웅이다. , 오늘날의 민족국가 또는 국민국가가 프랑스 혁명을 통해 탄생하게 된다. 근대적 민족주의의 출현이다. 아마도, 베토벤에게는 혁명의 보편성과 독일 민족주의라고 하는 특수성 양가의 감정이 나폴레옹에 투사 것은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한다. 

나폴레옹의 역사적 등장은 혁명직후, 자코뱅과 같은 급진파의 테러정치라고 하는 공포정치와 무관하지 않다.

프랑스 혁명은 1789년에 바스티유 감옥에 대한 파리 시민들의 공격으로 촉발된다. 이후, 시간이 흐르며 혁명의 주도권은 온건파 내지 중도파에서 극단적 평등을 주장하는 자코뱅과 sans-culottes(직역하면반바지를 입은 들을 의미한다. 당시 파리의 하층 계급이 이런 복장을 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에게 넘어가고 이들에 의해길로틴으로 상징되는 고발과 처형의 악순환이 반복된다. 

하지만, 이들 자코뱅의 당통, 로베스삐에르 등도 혁명의 적이라며 자신들의 정적을 처형했 듯이 자신들도 길로틴에 斬首(참수)된다. 이들 sans-culottes 20세기 중국, 문화대혁명 시절홍위병 같은 역할을 했다고 있다. 이와 같은 급진파는 마르크스가 구상했던프롤레타리아 독재 원형이 된다. 자코뱅은 러시아 혁명의볼셰비키’, ‘중국공산당 같은 혁명 前衛(전위) 정당의 起源(기원)이다.

이렇듯 혁명의 어두운 면이 프랑스 사회에 염증과 혐오를 불러 , 구국과 혁명의 수호자로 등장한 것이나폴레옹이었다. 오스트리아를 비롯 프랑스 주변국들은 혁명에 반동적 국가들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전개되고 있는 불온한 움직임에 대해서 언제든 이를 제압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은 내외의 반동세력 그리고 혁명의 급진세력으로 부터 동시에 도전 받고 있었다. 1899 지난 10년간 독재 민주주의에 대한 염증과 혐오에 지쳐 있던 프랑스 국민들 혁명전쟁의 영웅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열렬히 지지하고 환영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폴레옹은 좌파와 우파로 부터 동시에 공격을 받는 것이다.

교향곡 5운명(C minor)’ 역시 보나파르트를 연상하지 않을 없다. 1악장 Allegro Con brio 주제음으로 시작하는 개의 음표는 너무도 유명한데 이는 정확히 모르스(Morse) 부호의 ‘V’자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는 로마숫자 ‘5’ 그리고 ‘Victory’ 때의 ‘V’라는 의미의 外延(외연) 가지면서 은유적으로 나폴레옹의 역사적 운명성을 암시한다. 휘몰아치는 나폴레옹의 역사적 운명을 1악장이 보여주었다면, 2악 Andante con moto 그의 대관식과 정당성에 대한 나래이션을 들려주는 듯한 선율이 흐른다. 그리고 3악장과 4악장은 인간의 이성, 진보, 자유 그리고 인류의 미래에 대한 베토벤의 낙관적 에너지가 없이 터져 나오는 하다.

같은 번호의 피아노 협주곡 5 황제(Emperor;E major) 있다. 그런데, 당시 유럽에 황제라는 호칭은 러시아의 짜르, 오스트리아 황제, 그리고 나폴레옹 밖에 사용하지 않았다. 피아노 협주곡의 황제가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너무나 자명해 보인다. 1악장의 Allegro 전체 연주의 이상을 차지한다. 전유럽에 혁명의 이념을 전파하는 혁명군의 진군과 황제의 위엄을 표상하는 행진곡 풍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2악장, Adagio un poco mosso에서는 다시 심쿵하며 나폴레옹이라는 인물과 프랑스 혁명이라는 새로운 역사의 장이 신의 계시는 아닐까 反芻(반추)하듯 침잠하는 너무도 아름다운 선율이 흐른다. 그리고 마지막 3장은 베토벤 콘체르트 특유의 경쾌하고 활기찬 론도 형식으로 마무리 된다. Londo 항상 경쾌함과 우아함으로  오스트리아 황실의 궁정음악을 연상하게 된다. 베토벤은 대부분 합스부르크 제국 내에서 활동해 왔기 때문이다. 제국의 음악적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베토벤 콘체르토의 Londo 아닐까 싶다. 물론, 클래식 음악은 기본적으로 귀족적이다.

이렇듯 2개의 교향곡과 하나의 협주곡이 나폴레옹이라는 인물 또는 프랑스 혁명과 연관되는 것은 만큼 베토벤이 음악가로서 뿐만 아니라 당대의 시대정신을 자신의 음악 안에 體現(체현)하는 시대의 先覺(선각)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교향곡 No. 7 A major 나폴레옹에 대한 그의 양가감정과 태도가 아주 드러나고 있다. 1악장 Poco sostenuto – Vivace(일정한 템포로 약간 느리게-생생하게)에서는 이제 프랑스 혁명군과 싸우려는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러시아, 스웨덴 연합군의 진군을 연상하는 악상을 떠올리게 된다. 이어 2악장 Allegretto 라이프찌히 전투에서 희생된 게르만 군인의 주검을 위무하기 위한 진혼곡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3, 4악장은 예의 그의 인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의 에너지가 다시 분출된다. 베토벤은 7 교향곡이 자신의 최고 작품이라고 자평했다.

이렇게 혁명의 이념과 그의 구현자를 칭송한 , 다시 그의 패배를 기념하며 전투에서의 주검을 위로하는 음악을 동시에 작곡한 베토벤의 양가적 심리를 주목하지 않을 없었다. 물론, 현실적으로 그의 후원자 대부분이 신성로마제국의 나라들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귀족과 유력자들이었다는 점도 빼놓지 않고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베토벤의 음악을 이해하는데 혁명과 독일 민족주의라는 가지 역사적 변수 빼놓아서는 같다.

이렇듯 인간 역사와 사회는 단순하지 않은 같다. 그리고 이런 형용모순이 흥미로워 글을 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