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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글로색슨The Anglo-Saxons;The History of the Beginning of England

by neofluctus 2024. 1. 18.

 

  책의 저자 마크 모리스는 1973 생으로 영국사 사학자다. 킹스 칼리지와 옥스포드 대학을 나왔고 영국의 중세사 연구자.

우선 책의 주제와 상관없이 책을 조금 읽다보니 서유럽은 크게 라틴 문화권과 게르만 문화권으로 구분할 있는 관점이 저절로 생기는 것을 있었다. 따라서, 가톨릭이 지배적인 프랑스, 이태리, 스페인 그룹과 개신교가 우세한 독일, 영국,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을 각각 범주화 시키게 된다.

The Suton Hoo Helmet; East Anglia왕 Rædwald의 투구(620~625)로 1939년에 발굴되었다. 정교한 세공이 특징이며 영국의 투탕카멘이라 불리우기도 했다. from Wikipedia

중국사를 북방 유목민족과 남방 농경민간의 교류와 갈등이라는 프레임 위에서 조망하는 것은 상당히 효과적으로 중국사를 이해할 있는 관점을 제공한다. 마찬가지로 바이킹과 같은 북유럽 해양 세력을 중국사의 북방 유목민에 등치시킨다면 유럽의 역사를 이해하는 효과적인 분석틀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發想(발상) 하게 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서양사의 본류를 이해할 그리스 로마와 같은 고전시대를 연상하지만 지리상의 발견 이후 서양이 세계를 지배하는 물리적 힘의 원천은 오히려 이들 바이킹과 같은 해적, 무적 상업집단에서 찾아야만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미치기 때문이다. 결국, 바이킹이 유럽을 약탈하고 정복했던 성공의 경험이 신대륙의 발견과 성공으로 이어진다고 추론하는 것은 그렇게 무리한 역사 해석이 아닐 것이다.

넷플릭스 영화 The Last Kingdom은 주로 9세기 바이킹족의 침입을 받는 영국을 배경으로 한다 from Wikipedia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리스 로마 문명이라는 문화적 권력의 계승자인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이들이 동화되고 흡수되었다는 사실이다. 바이킹의 정복 과정에서 이들 북방 해양세력의 기독교화는 체제내화 혹은 유럽화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이들 야만족들을 구원받아야 어린 양이라 생각했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야심이란 측면에서도 유럽사를 이해하면 또다른 흥미로운 조망권이 확보될 같다. 그리고 나아가 지중해 문명권 외곽의 이질적 정체성이 프로테스탄티즘의 종교개혁으로 이어지게 만든 것은 아닌지 하는 역사해석 내지 추론도 본다. 

근대의 유럽은 라틴 유럽이 아니라 이들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이 중심이 되는 게르만족 중심의 북유럽 국가들이 이니셔티브를 쥐고 이끌어 역사라고 봐야 한다. 이들 북방의 야만족들이 그리스 로마와 같은 고전문명을 자기 나름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이 근대문명이고 역사적 전개과정은 아닐까?

댜양한 앵글로 색슨 동전 from Wikipedia

동아시아사와 비교할 유럽은 화폐경제가 번도 단절적인 역사를 경험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야만족이라고 밖에 없는 앵글로 색슨족이 브리튼 섬에 처음 정착하는 5세기에도 이미 다량의 동전들이 발굴되고 있고 이후 각각의 소왕국들도 은화를 발행하는데 번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번도 농업과 상업이 갈등하고 대립하는 국면의 역사적 흔적을 발견할 수가 없다. 상업과 화폐경제는 필연적으로 정복과 침략전쟁을 야기하기 때문일 것이다. 근대 동아시아에서 서양세력은 함포외교와 같은 무력 시위를 하며 개항과 같은 通商(통상) 요구를 했는데 이는 바이킹의 정복전쟁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면 역사의 연원과 맥락을 쉽게 간파할 있을 같다.

중국 명대는 원나라 시절의 화폐경제와 국제성을 모두 부정하고 현물경제로 퇴행하며 쇄국 정책으로 일관한다

서양의 , 중에서도 영국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하는 의문과 궁금증은 21세기를 사는 같은 필부에게도 항상 떠나지 않는 호기심, 궁금증의 중의 하나다.

이제 책의 내용으로 돌아가 보자. 이렇게 라틴 유럽과 게르만 유럽이라는 구분은 고대 로마 문화에의 同化(동화) 여부에 의해 그들이 선택한 언어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라틴 유럽은 고대 로마의 Vulgar Latin어가 지방언어화 되면서 각국의 로만어 게열로 진화하게 된다. 당시 프랑스와 독일, 북부 이태리를 지배하던 프랑크 족은 게르만어를 버리고 프랑스어 등을 쓰게 것이다. 반면, 영국은 고대 로마의 식민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마 제국의 붕괴와 동시에 연결고리가 그대로 단절이 되면서 정복 이주자들은 게르만어를 계속 사용한다. 이들 정복 이주자들은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켈트족과 거래, 결혼 등의 관계 발전 없이 단절적인 사회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정복된 켈트 토착민들을 노예 등으로 착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켈트족을 책에서는 브리튼인이라고 지칭한다.

5, 6세기 이후 앵글로 색슨족이 브리튼섬을 정복하며 세운 국가들. 바이킹의 침입 전까지 '전국시대'라 칭할함 하다.  9세기 바이킹의 침공 때 Wessex가 중심국가가 되며 앵글로 색슨족이라는 정체성도 이 때 만들어진다. 또 왼쪽에 점선으로 표시된 Offa's Dyke 서쪽의 켈트족과 앵글로 색슨족의 적대적 경계를 표시하는 상징으로 해석한다.

그러니까, 통상적으로 브리튼이라는 지명은 고대 로마인들이 앵글로 색슨족의 침입 이전에 사용하던 것이고 그런 문맥에서 섬에 대한 명칭이라고 이해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20세기 말까지 영국인들과 아일랜드간의 갈등의 골이 메워지지 않은 것은 이와 같은 역사적 맥락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위의 그림에서 보는 8세기 중반에 만들어지 Offa’s Dyke(Offa라는 왕이 만든 둑이라고 번역) 보면 이들 사이의 적대적 관계의 깊은 균열이 물리적인 형상으로 외형화되어 남아 있는 것을 목격할 있다. 

4세기와 5세기에 걸쳐 로마의 브리튼 섬에 대한 영향력은 서서히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게 된다. 이후 5세기와 6세기에 걸쳐 덴마크 주트, 북부 독일의 색슨, 앵글로 지역의 독일인들이 이주를 시작한다. 처음에는 로마의 시대에 성장한 토착 엘리트들이 북방의 스코틀랜드인 야만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용병으로서 고용했다는 등이 소개된다. 청부 용병으로 왔던 앵글로 색슨족이 그들을 고용한 브리튼 사람들에게 끝을 돌려 섬의 주인 행세를 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앵글로 색슨족의 7왕국이 군웅할거를 하는 영국판 전국시대가 8세기 , 9세기 바이킹의 침입이 시작될 때까지 계속된다. 위의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색슨족(Wessex, Sussex, Essex), 쥬트족(Kent), 앵글로족(East Anglia, Mercia, Nothumbria)으로 구분해 있다. 

한편, 앵글로 색슨족은 7세기가 되면 서서히 기독교를 받아 들이기 시작한다. 그들은 본래, 火葬(화장) 하는 葬墓(장묘)문화가 있었는데 아이들과 노예들을 함께 인신공양하는 풍습도 상당히 만연해 있었다. 노덤브리아의 유력자 집안 출신 St. Wigfrid 의해서 기독교의 수용이 가속화 된다. 유럽 특히, 로마 방문을 통해 제국의 위용에 크게 감명을 받게 된다. 브리튼 섬은 고대 로마 시절부터 아일랜드의 콜롬바 성인을 필두로 기독교가 상당히 보급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들 정복 이주자들과 켈트족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기독교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서 典禮(전례) 등에 따른 의견차가 커진다. 시대의 교통, 통신 인프라의 한계 로마 교회와 동방 교회 사이의 전례 신학상의 의견 차이가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아일랜드의 기독교 역시 지리적 한계로 인해 로마 교회의 세련된 典禮(전례) 등에 비해 아일랜드의 전례가 다소 촌스러웠던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탁발의 형태를 어떻게 것인지 그리고 부활절을 결정하는 역법 등의 계산 등에서 의견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전례 상의 의견 차이는 정치적 성격도 띄고 있었다. 이와 같이 앵글로 색슨인들은 로마 교회와 직접적인 관계를 모색하며 로마 가톨릭의 영향권에 포섭되는 과정이었다. 

앵글로 색슨 7국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서로의 세력권이 시시각각으로 변화하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Wessex 중심 국가로 성장하게 된다. 여기서 Wessex 서쪽의 색슨족, Sussex 남쪽의 색슨존, Essex 동쪽의 색슨족이라고 이해하면 좋을 같다. 이같이 Wessex 중심으로 세력이 재편될 있었던 배경은 바이킹의 침입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고 봐야 한다. 

여기서 9세기 후반부 웨섹스의 ,  알프레드 대왕 대해 주목하게 된다.  7왕국 내부의 분열과 다툼은 바이킹 족의 침입에 브리튼 섬을 취약하게 노출시킨다. 이때 부터 앵글로 색슨족은 뿌리를 함께 하는 동족이라는 민족적 동질성을 강조하고 선전하면서 통합해 나간다. 물론, 거기에는 알프레드 대왕이 중부와 동부 바이킹 국가들을 제압한 물리적 힘에 기반한다. 다른 한편으로 알프레드는 그리스어, 라틴어로 번역된 책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최초로 시작한다. 그때까지 일부 공문서를 영어로 작성하는 일은 있어도 문학, 철학 등의 고전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미, 9세기부터 영어를 공식적인 언어로 사용하게 것이다. 1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갈고 닦은 영어의 저력이 이때부터 축적되기 시작한 것이다. 알프레드는 ‘bur’라고 하는 지방군사 요새 등의 건설을 통해 중앙집권화의 토대를 구축한다. 

이와 같이 자신들의 고유어를 쓰고 읽기 시작했다는 것은 영국이라는 나라가 제국으로 발전하는데 엄청난 원동력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있을 것이다. 중국을 지배했던 수많은 북방 유목민족들이 자신들의 고유어를 갖지 못하고 중국 문화에 동화되고 멸망한 다음 그렇게 흔적도 없이 역사의 신기루로 사라져 버린 것과는 커극명한 대조를 이룬다.(정말 많은 생각들이 오고 가는 역사적 장면이다.)

알프레드 사후 웨섹스의 왕들은 단명하고 바이킹의 침입은 다시 거세진다. 이때부터는 이미 앵글로 색슨왕국에 대해 덴마크 출신 바이킹 왕국들의 주도권을 행사하게 된다. 서서히 그러나 돌이킬 없는 대세를 형성하게 되고 이들 서로 다른 이민족과의 혼혈이 왕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1066 노르만디의 윌리엄과 헤이스팅스 전투 이후 영국의 지배계급은 거의 대부분 사라지게 된다. 당시 왕실로부터 토지를 하사 받은 1000 명의 귀족들 살아남은 이들은 18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들 지배계급이 괴멸적 타격을 입게 된다. 노르만 족의 침입으로 영국사회는 근본적인 사회질서의 변화를 겪게 되는데 하나는또는요새 건설을 통해 노르만 정복 왕조가 사람들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시스템의 건설이었다. 다른 하나는 이때부터 영국인들이 노예로 팔려 나가는 것을 금지하게 된다. 이전 까지는 전체 인구의 30% 노예였다고 하며 윌리암의 정복 직후에는 숫자가 1/4 줄고 얼마 뒤에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노르만족의 영국 정복은 영국 역사의 많은 장점을 안겨다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저자 마크 모리스는 노르만족의 정복을 영국의 역사의 幕場(막장) 아니라 새로운 출발이라며 결론을 맺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