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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언제 神(신)이 되었는가

by neofluctus 2023. 8. 11.

When Jesus became God?라는 표제는 원래 기독교 내부에서도 예수를 하느님이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또 그렇게 믿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는 성부, 성자, 성령을 삼위일체라는 교리로 설명하고 있지만, 신약성서의 공관복음共觀福音 어디에도 예수를 하느님이라고 오해?할만한 언급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예수는 팔레스타인 갈릴레이 지방, 유대인 목수의 아들이었다. 이곳 중근동 지역은 유대교의 야훼, 또는 7세기에 출현한 이슬람교의 알라처럼 유일신 신앙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목수의 아들을 神格化(신격화)할 수 있었던 그리스 로마의 전통과는 확연히 구별이 되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유대교에게  기독교의 삼위일체Trinity 교리와 같은 주장은 대단히 낯설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도행전을 통해서 바오로 사도의 체험과 啓示(계시)를 부정할 수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카톨릭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청년기를 거치면서 기독교에 대한 애증, 반감과 공감의 경계 선상 어디 쯤에 항상 어정쩡하게 서 있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청년기 기독교는 서구 제국주의 뒷배처럼 인식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중년의 나이가 되어서도 그 종교 안으로 더 이상 깊게 천착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 책을 선택해서 읽게 된 동기도 다시 한 번, 아직까지도 충분히 이해되지 않은 이 종교와 나와의 연관성을 발견하고 싶은 숨어 있는 願望(원망)이 있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이 책의 내용은 예수가 신이냐 인간이야 하는 서로 다른 주장이 경쟁하다 전자가 승리하는 역사적 과정을 이야기 한다. 아리우스Arius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라는 두 인물로 대표되는 ‘예수의 神性(신성)과 人性(인성)’에 대한 기독교 교리 논쟁은 4세기에 시작되었다. 예수의 사후 300년 동안 지속되었던 박해가 끝나고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서 기독교가 로마의 공식 종교로 인정된 시점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아리우스라는 문제적 인물에 대한 소개를 조금 간단히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대단히 흥미를 끄는 전형적 빌런villain이기 때문이다.

 

 

“이 빨간 머리의 부제는 4세기의 새로운 유형new men의 사람이었다: 대박해 시대가 끝나고 난 뒤에 출현했고; 그의 부모는 이교도였을 가능성이 크지만 고전교육이 아닌 기독교 교육을 받았고; 현실 세계의 권력관계에 대해 대단히 능수능란한 교활함을 구비한 인물이었다. 이론적 명민함, 원칙에 대한 무시무시한 집착과 정치적 무자비함의 조합은 마틴 루터, 존 칼빈에 이어 블라드미르 레닌이 출현할 때까지 그에 견줄만한 역사적 인물은 없었다.”고 루빈스타인은 소개한다.(Rubenstein, Richard E.. When Jesus Became God: The Struggle to Define Christianity during the Last Days of Rome (pp. 104-105). Houghton Mifflin Harcourt. Kindle Edition. )

 

한편, 그와 동시에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대립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훨씬 크다.

 

당시 고대 사회는 동로마 사회가 훨씬 풍요롭고 세련된 선진 사회였다. 이탈리아 반도를 비롯한 서유럽은 촌뜨기 취급을 받았다. 그리스 고전 교육에 익숙한 동지중해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갈릴레이 벽촌 출신의 ‘예수’라는 인물이 보여준 매력과 모범에 크게 공감한다. 예수라는 전범典範을 통해 인간이 노력을 통해 인간 자신 뿐만 아니라 인간사회를 충분히 성화聖化시키고 거룩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아리우스의 견해에 동조했던 이들 동지중해 사람들은 또 성性적 욕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인간이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낙관론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성욕은 이들 논쟁의 핵심적 주제 중의 하나였다. ) 도시화된 동로마 사회의 장인artisan, 노동자, 선원, 상인, 승려와 수도자들 그리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고 있었다. 

 

반면, 아타나시우스는 예수의 모범은 사막의 성자와 같은 수도자들 한테만 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했고 오로지 하느님의 일방적인 자비를 통해서만 그 구원이 가능하며 그 하느님의 자비는 교회의 성사聖事sacraments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pp. 149-150). Houghton Mifflin Harcourt. Kindle Edition.] 또, 인간의 성욕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으며 오직 신만이 그것을 다스릴 수 있다고 믿었다. 이후 전개되는 서로마 교회의 모습과 와 서유럽의 기독교는 예수를 이렇게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이 같은 논쟁의 근저에는 당시 로마 제국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만 한다. 과거, 유대왕국이 로마제국에 의해서 멸망할 때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던 사람들은 세상의 종말apocalypse에 대한 존재론적 위기의식에 휩쌓여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제국 로마의 영광이 영원할 것처럼 알고 살았던 4세기의 로마인들은 제국의 귀퉁이가 붕괴하기 시작하는 상황을 점점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콘스탄틴 대제의 사후 그 아들들에 의해 제국은 다시 분열되고 훈족의 서진으로 다뉴브 강 유역의 게르만 족이 로마의 영내로 밀려들면서 378년  하드리아누스(현재, 튀르키에의 북서 유럽 영토)에서 로마제국의 군단이 황제와 함께 거의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경험하게 된다. 이 사건은 더욱 로마 제국의 종말, 세상의 종말로 연상이 되면서 아리우스파가 주장하던 낙관론은 로마제국 안에서 사라지고 아타나시우스의 삼위일체론이 지배적인 교리, 기독교의 공식 도그마로 자리 잡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리우스의 견해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슬람교로 계승이 되는 것처럼 보이며 유대교 역시 예수를 한 명의 ‘예언자’로만 평가하는 관점으로 이어진다.

 

나는 性慾(성욕)이라는 주제가 이들 논쟁의 발화점의 하나였다는 주장이 대단히 흥미로웠다. 서방 카톨릭 교회가 로마 그리스적인 전통에서 예수를 신격화 했다고 이해했었지만 정작 예수를 신으로 절대화 시킨 것은 인간이 너무나 나약해서 성욕과 같은 근원적 욕망을 통제하거나 지배할 수 없다는 한계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일종의  劇的(극적) 反轉(반전)처럼 이해되었다. 초기 기독교는 난삽한 성적 관행에 대해서 대단히 엄격한 태도를 취한다. The Wierdest라는 책을 읽다보면 초기 기독교가 사촌, 육촌, 팔촌 등으로 근친결혼을 금지하는 칙령을 지속적으로 발표한다. 이를 통해 귀족들의 토지가 교회로 수용되고 이것이 유럽 사회가 친족적 혈연, 지연적 혈연 관계로 발전하지 않고 개인주의적 법치주의적 사회로 진전해 나갈 수 있었던 배경이라 그 책은 주장한다. 

 

루벤스타인 책의 미덕은 이해하기 힘든 종교, 철학의 문제를 역사적 맥락 속에서 설명해 주는데 있다. 21세기는 데이타 사이언스를 바탕으로 한 AI(Artificial Intelligence)가 등장하고 계몽주의, 휴머니즘이 절정에 달한 시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 주식 전문가는 유튜브 방송에서 인공지능의 시대를 역사적으로 철기시대의 도래에 비견될 만큼의 대사건이라며 호들갑을 떤다. 서유럽 사회가 중세에 아리스토텔레스를 재발견한 이래 ‘근대Modernity’라는  역사의 지평을 열고 그 연속선상에서 AI의 시대에 진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AI시대의 이데올로기는 동성애를 성적 倒錯(도착)이라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이 變態(변태) 성욕을 普遍(보편)이라 주장하며 異性(이성) 性慾(성욕)을 異常性慾(이상성욕)이라 윽박지른다. 참 기가 찰 노릇이고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이슬람교는 여전히 설득력, 遡求(소구)의 힘을 갖는 종교 같다.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예전에 읽었던 기독교사의 저자는 기독교를 아직 신생종교로 표현하고 있었는데 그때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면서 인간의 어리석음과 오만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는 사실을 관찰하면서 기독교는 서구 사회에서 조만간 찬란하게 부활하리라 과감하게 예상해 본다. 

 

청년시절 '성욕'은 나를 求道(구도)로 이끄는 원동력이었다.

 

아무튼, 신의 은총과 금욕이 아니라 콘돔과 백신, 그리고 이혼소송으로 성욕을 관리하는 21세기에, 신은 어떤 모습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게 될지 몹시도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