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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다시 계몽(Enlightment Now)

by neofluctus 2024. 5. 2.

스티븐 핑커는 캐나다 퀘백 출신이다. 유태인으로 1926년 폴란드와 루마니아에서 영어를 쓰는 퀘백의 커뮤니티로 이주했다. 현재 하버드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빈 서판’을 읽고 바로 스티븐 핑커의 최신작 "지금 다시 계몽Enlightment Now”을 선택한 것은 그만큼 ‘빈서판’의 내용이 설득력있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스티븐 핑커를 읽게 된 동기는 그의 진화 심리학, 특히 언어 심리학에 대한 관심이었지만 ‘지금 다시 계몽’은 대단히 정치적 사회적 성격을 띠는 내용이었고 결과적으로 인문 및 사회 과학적 주제로 회귀하게 되었다.

근대 자연 과학의 성취와 함께 근대 서양 철학은 그 내용을 수용하며 새롭게 변한 세계관을 업 그레이드 하기에 바빴다. 당연히, 그 모든 과학적 발전이 근대의 사회, 정치의 형식과 내용을 규정지었다는 사실도 분명하다(스티븐 핑커는 영미권 대학의 인문, 사회 과학 분야의 위기에 대해서 그들이 과학의 성취를 간과 또는 무시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인문 사회 과학과 자연 과학 간의 학제적 융합이 인문 사회 과학의 활로가 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스티븐 핑커를 Public Intellectual(이걸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모르겠다)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 책은 더욱 그런 사회적 명망에 걸맞는 내용인 것처럼 보인다.

책은 크게 3부, 2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계몽주의에 대한 개관, 2부는 계몽주의 내용과 전개 과정 등을 상술하고 있고 마지막 3부는 각 장 이성, 과학, 휴머니즘이라는 주제로 그의 계몽주의로의 회귀를 주장하고 있다. 

‘빈 서판’이 좌파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뤘다고 한다면 “지금 다시 계몽”은 ‘정치적 올바름’과 같은 좌파급진주의뿐 아니라 특히 트럼피즘으로 상징되는 우파 포퓰리즘에 대한 공박이 주를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시 이 두터운 책을 그와 같이 정치적 내용이 전부인 것처럼 소개하는 것은 크나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주 논거로 통계가 주로 사용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최근의 데이터 사이언스를 반영하는 서물이기도 하다. 

먼저, 이 책을 읽으며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있어서 적어도 공적, 사회 정치적 영역에서는 과학이 우선권을 행사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더욱 동의하게 된다. 근대 사회를 추동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힘이 서양의 근대 과학임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현재와 같이 종교가 과학의 틈새를 노리며 공격하는 게릴라식 전술로는 결코 과학과의 정규전에서 승리할 수 없을 것이다. 과학적 방법으로 神(신)을 논증할 수 있는 방법은 너무 궁색하며 전지 전능한 신의 입장에서도 굳이 그런 식의 인간들의 힘겨운 증명과 사투를 필요로 할 것 같지 않다. 종교가 과학과의 적대적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 옹색한 이유는 그 제도적 종교의 기득권을 지키고 수익을 보존하겠다는 동기가 아니라면 근대의 과학적 성과들을 무시하는 혹세무민이란 오해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현대의 시대정신은 종교를 지극히 개인적 주관적 영역으로 축소, 침잠하게 만드는 것으로 인정해야만 할 것 같다.

두 번째 나의 계몽은 '기후 위기’에 대한 관점의 변화다. 지구의 지질학적 역사와 선사 시대의 빙하기 등은 인정을 해도 역사 시대에 와서의 기후 변화에는 다소 둔감했는데 독서와 정보가 늘수록 ‘기후변화’가 항상 역사의 변곡점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물론, 기후 변동은 인위적인건 자연적이건 인간 삶에 엄청나게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설사 그것이 杞憂(기우)라 하더라도 음모론에 빠져서 허우적 대기 보다는 모든 위험에 대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인간의 선택으로 보인다. 물론, 서방의 일부 세력이 기후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노골적인 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스티븐 핑커는 거의 7만 명에 가까운 과학자들 중 단 4명만이 인간활동에 의한 이산화탄소가 온난화의 주범이 아니라는 데이터를 제시한다.

또, GMO(Genetically Modified Organic;유전자 조작 농산물)는 수 많은 환경 단체들의 선전 선동과 다르게 결코 해롭지 않다고 계몽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봐도 그 화학식이 동일한데 그 탄수화물과 지질 등이 돌연변이를 일으킨다는 주장은 터무니 없다. 찰스 다윈은 자연계에서 생명이 탄생한 이래 끊임없는 변이를 통해 생물이 진화해 왔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환경 단체는 그 진화의 법직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어리석고 반과학적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또, 1950년대 이후 시작된 녹색 혁명을 부정하는 결과가 된다. 1960년 세계 인구가 30억 명 남짓이다. 2022년 세계 인구는 80억에 약간 못미친다. 만약 환경 단체의 주장대로라면 그 50억 인구를 절멸시켜야만 한다. 이와 같이 20세기 질소 비료, 유전 과학의 혁명은 한 세기만에 인류의 인구를 기하 급수적으로 늘릴 수 있었다. 질소 비료도 조작된 것이며 인간의 주곡이 된 쌀과 밀 역시 인간 조작의 산물로 인류의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또 좌파들은 양 차 세계대전 등을 계몽주의적 세계관의 자기 파괴를 대표하는 표상으로 공격하지만 천연두 백신을 개발해 3억 명의 목숨을 구해낸 것과 같은 사실은 무시하거나 간과한다고 논박한다. 역사의 功過(공과)는 항상 공평하게 논의되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은 언론의 부정적 기사에는 민감하지만 그 賞讚(상찬)에는 항상 인색하다. 언론 비지니스가 이런 인간의 본성을 간과할 리는 없을 것이다. 

스티븐 핑커의 논지가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미국 사회의 정치 경제적 양극화를 이 계몽주의의 부활로만 해결하거나 설득시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상황은 선진 사회의 엘리트와 대중간의 갈등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주류 엘리트와 주변부 지식인 간의 대결이라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미국 사회가 우파 포퓰리즘에 지배되는 것처럼 한국 사회는 좌파 포퓰리즘에 압도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좌파 엘리트들의 활약은 대단히 선정적이고 효과적인 반면 우파 엘리트들의 기생적 본성은 너무나 굼뜨고 게으른 것처럼 보인다. 

스티븐 핑커는 1950~60년대 미국의 평등 지수가 높았던 것은 전시라는 특수 상황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평화의 시기가 오면 불평등 지수는 당연히 증가한다는 식으로 설명하지만 이는 지극히 반계몽적 자가당착이라는 생각이 든다. 

스티븐 핑커는 칼 야스퍼스가 말한 ‘軸(축)의 시대(The Age of Axis)처럼 계몽주의 시대를 인류 역사의 또다른 획기적 轉機(전기)라고 파악한다. 계몽주의 시대 이전의 십자가형, 거열형(車裂刑), 화형, 효수형, 팽형(烹刑) 등과 같이 잔악한 형벌이 모두 계몽주의로 인해 폐지되었다는 사실 등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선진국에서도 피지배 계급이 소위 추위, 헐벗음과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20세기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미국 1%의 부자들이 전체 GDP의 50%라는 천문학적 규모의 부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인류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최초의 경험이다. 역사 속의 어떤 황제와 귀족들이 그 정도 규모의 부와 사치를 누릴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모든 편중이 그들의 유전자 로또 때문이라고 과학적 진보는 밝혀내고 있다. 이 “유전자 로또”와 “왕권 신수설”은 크게 다르지 않으며 이렇게 심각한 불평등을 합리화할 수 없어 보인다. 사회의 모든 부와 권력을 독점한 전 근대의 왕정 혹은 전제정을 몰아낸 계몽주의와 현재의 상황이 뭐가 그렇게 다른지 모르겠다.

‘진보’는 불가피, 불가역적 진행과정이라고 봐야 한다. 진보는 선택적으로 취사할 수 없을 것이다. 19세기 대중보다 21세기 대중은 정보도 교육도 더 많기 때문에 소련 사회주의 실험이 실패했다고 해서, 자본주의 사회가 그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타협하고 베풀었던 모든 시혜를 거두겠다는 발상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우선은 급한 불을 끄기 위해서인지 몰라도 밀턴 프리드먼의 ‘기본 소득’을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을 7번 반복한 50년째가 되면 대희년이라고 해서 채무자들의 빚을 모두 탕감해주었다. 한국의 경제 발전을 가능하게 했던 가장 중요한 모멘텀으로 이승만과 조봉암이 협력한 “토지개혁”이 있었다.

스티븐 핑커의 “계몽주의”는 낡은 방법을 혁신의 대안으로 착각하는 잘못된 처방처럼 보인다. 그러나, 창조적 파괴는 고통을 수반하게 마련이라 누구도 쉽게 성공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적응이라는 자연 선택의 논리는 국제 질서, 국내 정치 질서에도 여전히 적용 가능한 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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