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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서판(Blank Slate)

by neofluctus 2024. 4. 28.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스티븐 핑커는 인지 심리학자(cognitive psychology) 및 언어 심리학자이며 진화 심리학과 ‘마음에 대한 컴퓨터 이론 (the compuational theory of mind)’의 지지자라고 소개한다.

역시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인지 심리학이란 행동주의 심리학(behaviorism)에 상반되는 현대 심리학으로 소개한다. 그리고 인지 심리학의 한 분야로서 언어 심리학이란 인간의 언어 기능 또는 능력이 행동주의 심리학이 주장하는 것과 다르게 선천적으로 타고난 능력이라고 한다. 스티븐 핑커뿐 아니라 노암 촘스키와 같이 진보적 입장에 선 과학자들도 인간의 언어 능력은 선천적이라 한다. 보통 사람들도 쉽게, 진화론적으로 인간에 가장 가까운 침팬지에게는 언어 능력과 이성적 추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간단하게마나 스티븐 핑커에 대한 이런 소개가 필요한 이유는 나처럼 그의 학문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소화하는 데 매우 중요한 효소가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동주의, 인지심리학, 진화 심리학에 대한 간소한 이해가 필요해 보인다. 이런 심리학적 이해는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혹은 무엇이라 파악하는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그에 따라 인간 사회에 대한 이해 방식과 그 문제에 대한 처방과 해결책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스티븐 핑커는 ‘빈 서판(Blank Slate), 고상한 야만인, 기계 속의 영혼’이라는 개념을 인간 본성에 대한 대표적 오해 혹은 착각의 삼위일체론이라고 말한다. ‘빈 서판’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마음과 지성이 백지 상태로 태어나며 주변 환경에 따라 규정된다고 한다. 따라서 그 주변 환경의 인위적 조작을 통해서 얼마든지 변혁이 가능하고 최종적으로는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고상한 야만인’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인간은 원시 상태에서는 고상했지만 근대의 자본주의 근대 문명이 그들을 타락시켰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기계 속의 영혼’이란 앞의 두 개념과는 약간 그 궤를 달리한다. 앞의 두 가지가 다소 유물론적 입장이라면 ‘기계 속의 영혼’은 데카르트 합리론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그 우월한 영혼이 기계인 인간의 몸과 행동을 규정하고 지배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앞의 두 가지와 같은 의미로 읽어야 한다. 

제목이 ‘빈 서판’이라, 이 개념을 옹호하는 것 같지만 반대로 이 책은 인간의 마음과 지능은 백지 상태에서 출발한다는 일종의 경험주의적 유물론적 사고를 비판하고 부정하는 것이 그 주요 내용이다. 물론, 인지 심리학은 기본적으로 진화 심리학이고 진화 심리학이란 유물론적 입장에 선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화’란 개념은 무기물이 탄소 원자를 분자의 구성물에 포함시킴으로써 유기 분자가 되고 생명체가 되었던 것처럼, 또 암수가 분화되고 식물과 동물이 나뉘어졌던 것처럼, 인간이 감정과 의식을 가지게 된 것을 일종의 심리적 진화 과정이라 파악한다. 예를 들어, 인간의 영혼이 있다면 그 마저도 진화의 산물이라고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책을 읽다 보면, 스티븐 핑커는 진화 심리학을 지지하기는 하지만 무수한 우연성 속에 마주하는 인간과 ‘인간 역사’의 운명을 동시에 말한다. 이렇게 종합적인 사유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가 유명한 지식인(public intelligent)으로 세계적 명성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화론과 과학을 말한다 해서 기계적 유물론이라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일이다. 삶의 경험이 부족한 어린애가 아니라면 사람의 인생과 역사에 운명적 우연을 부정하는 것처럼 무지한 어리석음도 없을 것이다.

인간의 본성을 바꿔 세상을 변혁시키겠다는 실험은 소비에트 혁명, 캄보디아 크메루 루즈 정권의 대학살, 히틀러의 나찌 정권 등 20세기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고 결과적으로 모두 실패로 끝났다(나찌 철학은 경험론적 유물론이 아니라 ‘기계 속의 영혼’처럼 관념론적 우월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런 역사적 실험의 결과는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 더 깊이 있는 이해와 통찰을 요구한다.

소련이 붕괴한 후 서방의 지배 엘리트 계급은 이런 시대의 흐름을 간파하고 신속하게 자유주의적 세계 체제로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9.11테러라는 슈퍼 일국 체제에 대한 저항이 있었고 그 응징으로 이라크 침공,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함께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국내적으로 미국은 이 시기를 전후해 소련의 붕괴와 함께 다 꺼진 불인줄 알았던 혁명적 유물론이 다시 창궐하기 시작하는 것을 인지했는데 2004년 이 책이 나온 배경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2016년에 이 책이 번역되었는데 한국 사회에서도 뒤늦게 이런 흐름을 파악하기 시작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자유와 평등’의 개념은 충돌한다. 20세기의 급진적 실험이 실패한 것이 분명하지만, ‘자유’란 개념의 완전한 승리로 끝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유와 평등’의 개념은 경제학의 필립스 곡선 ‘고용과 물가’의 관계처럼 해석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자유와 평등'의 개념을 적대적 관계가 아니라 '적정한 균형이 필요한 개념'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통화 정책을 통해 거시 경제를 조작하 듯이 양자의 균형을 보다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정치 시스템이 출현을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느 작가의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읽으니 스티븐 핑커가 미국의 정치 제도가 이 두 가치의 균형을 가장 적절하게 제시하는 정치 체제로 소개한 다고 썼는 데 나는 그런 언급을 발견하지 못했다. 또 그 굳이 그 균형의 예시에 대해 생각하면 독일이나 일본과 같은 나라의 인민들이 훨씬 더 나은 것처럼 보인다. 각국의 정치 경제 엘리트들에게는 미국이 불만족스럽겠지만 상당수의 중간 계급은 독일과 일본과 같은 2등 국가의 인민들이 더 행복하다고 보고 싶다.

서방 엘리트가 주장하는 것처럼 세계화 정책은 선진 경제 사회에는 양극화를 가져왔지만 중국 중산층의 성장을 통해 세계적으로는 평등이 확장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중국 사회의 전체주의적 경향성의 강화와 대만 침공 시도는 중국 사회도 마찬가지로 내부의 불평등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스티븐 핑커는 정치, 폭력, 성, 어린이, 예술과 인문학의 영역에서 “빈 서판”이란 사고에 지배되는 이데올로기들을 비판한다. 이중 어린이 부분에서 행동 유전학에 근거해 세 가지 법칙을 말한다. 인간은 유전적 영향에 강하게 지배받는다. 그러나, 동일한 가정 환경은 그 영향이 미미하지만 개별적 경험 특히 또래 경험을 통해 유전적 경향이 발화되는 것은 크게 다르다는 내용이었다(그러니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너무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예술과 인문학에서는 ‘성 선택’ 이론에서 가져 온 개념들로 적극 설명하면서 모더니즘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반근대성을 비판한다. 아마도 모더니즘 내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조는 ‘고상한 야만인’라는 개념에 거의 날 것 그대로 노출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서양 고전 음악은 적어도 19세기 후반, 특히 20세기 초반을 지나면 기억하고 연주해야 할 음악과 음악가들이 현저히 줄어들게 된다. 서양 문학도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은 거의 그 시기에 멈추어 더 이상 그 생산력을 상실해 버린다. 고전 예술의 몰락은 한 마디로 형식의 파괴에서 오는 것이 대표적이다. 음악에서는 화성과 화음을 파괴한 불협 화음 등으로 표현되는 현대 음악이고 미술에서도 인상주의Impressionism에서 시작되는 형식의 파괴와 궁극적으로 추상 미술의 등장을 그 대표적 예로 든다. 캔버스 위의 네모, 세모, 원 그리고 격자 무늬에 그렇게 높은 그림값을 매기고 소위 ‘팝 아트’라며 만화같은 그림에 거액을 갖다 바치는 불합리는 성선택을 통해서 또는 행동 경제학으로 합리화하게 된다.(정치, 폭력, 성에 대해서는 너무 흔한 내용이고 기억에도 남지 않았다)

20세기는 계급 해방, 성 해방, 민족 해방과 같은 인간 해방의 旗幟(기치)가 인간 역사의 그 어느 시기보다 하늘 높이 휘날렸던 시대였다. 그리고 적어도 21세기에도 여전히 그런 가치들에 대한 신념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일종의 신앙인 또는 종교 집단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과학은 우리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를 더욱 심화시키고 우리를 계몽시키고 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록 우린 보다 더 현명하게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처럼 읽힌다.

"있는 그대로의 인간 민낯을 보고 이야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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