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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세계의 창조: 영국 계몽주의의 숨은 이야기

by neofluctus 2024. 4. 4.

근대 세계의 창조는 영국 계몽주의에 관한 책이다. 여기서 영국이라 함은 스코틀랜드 등을 포함한 브리튼을 의미한다. 저자 로이 포터는 계몽주의 의학사가 전공이라고 소개된다. 2000년에 출판된 책이고 한국에서는 2020년에 번역 출판되었다. 번역은 누가 봐도 정말 꼼꼼히 잘된 작업이란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영어 실력이 정말 출중한 번역자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가끔 생경한 어휘들을 한자어 附記(부기)없이 댕그러니 던져 놓을 때의 무성의인지 부주의는 조금 아쉬웠다.

일반적으로 ‘계몽주의’는 영국에 앞서 프랑스 계몽주의가 대세처럼 들린다. 특히, 장 자크 루소,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이 말 그대로 유명세를 얻고 있다. 그러나, 실제 이들 프랑스의 이단자들은 때로 본국의 박해를 피해 브리튼 섬에 자신들의 안위를 담보해줄 은신처를 구하기도 한다. 브리튼 섬은 1688년 명예혁명을 지나고 나면 법적으로 완전한 언론, 출판의 자유가 공식화되고 그 이후 현재까지 한 번도 그 자유가 침해되지 않았다. 당연히 이들 프랑스의 반항아들에게 관찰되는 영국은 羨望(선망)일 수 밖에 없었고 그들의 생각에 깊이 각인되었다. 때문에 저자는 책 제목처럼 근대 세계는 영국 계몽주의를 통해 창조되었다는 것을 함축하고 싶었던 것 같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미국 역사가 니얼 퍼거슨은 브리튼 제국으로의 전환에 결정적 사건으로 명예혁명, 1707년 스코틀랜드와의 통합, 7년 전쟁(1756-1763) 세가지를 꼽는다. 그리고 그중에서 명예혁명과 함께 그 사건에 가려진 채 진행된 네덜란드로부터 선진 금융시스템의 도입과 같은 사회경제적 변화를 영국이 제국으로 성장하는 근간이 되었다고 밝힌다. 1694년 영란은행과 같은 중앙은행의 설립은 동인도 회사와 같은 기업 그리고 전쟁에서 효율적인 자원, 자본의 집중적 배분을 통해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경쟁국들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게 만들어 준다.시기적으로 브리튼 계몽주의는 명예혁명으로부터 프랑스 혁명 전후 시기의 사상적 조류를 말한다. 이 시기 영국은 정치경제적으로 상당히 안정되었지만 프랑스는 그렇지 못했고 그것이 프랑스 혁명의 결정적 배경이 된다.

대륙의 계몽주의와 차별되는 브리튼 계몽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경험주의’다. 저자, 로이 포터는 영국의 계몽주의와 동프로이센 시골 구석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를 대비시킨다. 칸트는 프리드리히 대왕 치세의 프로이센 국가를 이성과 합치된 완전 국가라 인식한다. 칸트가 살았던 퀘니히스베르크는 현재 러시아의 고립된(발트해, 폴란드, 에스토니아 사이에 낀) 영토 칼리닌그라드에 해당하며 융커계급으로 대표되는 전근대적 농노제가 지배적인 사회경제 체제였다. 칼 마르크스가 항상 이야기 하듯 “사회경제적 하부 구조가 정치, 사상과 같은 상부 구조를 규정한다”는 유물론적 명제는 대륙의 관념론을 이 경험주의 철학과의 차별을 매우 설득력있게 설명해주는 것 같다.

대륙의 관념론은 인간의 인식과정이 선험적이라고 주장한다. 先驗(선험)a priori적이란 의미는 우리의 유전자 내에 윤리적 도덕 규범 등이 이미 내재되어 있다가 발현된다는 주장이다. 도덕과 윤리가 생득적이라는 것이다. 반면 영국인은 신생아가 완전 백지 상태로 태어날 뿐, 경험과 관찰을 통해 그 빈 도화지를 그려나가는 것처럼 윤리 의식을 획득하는 것이라 주장하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즉, 인간의 마음은 이성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감정의 세트들이 결합해서 인식론적 발전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을 읽다가 그만 두었는데 도덕감정론의 내용 역시 인간의 도덕감정이 어떻게 생기는가 하는 내용이었다. 스미스는 도덕을 이성과의 관계가 아니라 감정과의 관계로 얽는데 바로 이런 특징이 대륙과 대비되는 영국적 사유의 특징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식의 인식론의 전개는 프란시스 베이컨, 존 로크의 사상의 근간을 이루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12세기 로저 베이컨에게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아담 스미스는 동감sympathy과 관찰자의 동의를 통해 행위의 적정성으로서 도덕, 윤리를 파악했다.

1687년에 발표된 아이작 뉴턴의 프린키피아는 르네상스 이후의 과학 혁명에 정점을 찍는 서물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사실, 근대 자연과학이란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본래 창조의 神秘(신비)를 주의 깊은 관찰을 통해 그 객관적 인과관계 등을 밝혀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발견을 문명의 발전으로 모사, 응용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 계몽주의자들에게 ‘自然(자연)’이란 개념은 상당히 중요하다. 뉴턴의 프린키피아에서 밝힌 것처럼 자연, 우주에는 그 자체에 합목적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던 것이다. 그것이 코스모스를 말하는 것이고 음악적 和聲(화성)과 같은 질서를 말하는 것이다. 

아담 스미스의 도덕철학 역시 이 자연의 관찰이라는 의미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담 스미스 이전은 도덕 경제 사회였다. 경제활동이 선과 악으로 구분되며 대부분의 영리 활동은 악으로 단죄되었다. (이는 조선 사회가 성리학적 교리로 사농공상 사회가 강제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중세 기독교 사회 역시 상업 활동을 경시 또는 죄악시했다) 반면, 중상주의 사회의 활력과 풍요를 목격한 아담 스미스는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시장의 원리, 사회 발전의 동력으로 인식하는 혁명적 의식 전환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19세기 초 켐임브리지의 토마스 로버트 맬서스는 부자들의 사치와 정부의 재정지출을 옹호하는 유효수요Effective Demand 이론을 주장하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자유주의 경제철학은 시장경제라고 하는 자연 관찰의 결과에서 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그 기본 경제 관념은 어설픈 작위보다는 경제의 자연적 순환의 힘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동물 또는 인간의 소화작용이나 혈액순환이 목적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 듯이 그 자연의 질서를 있는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케인스 경제학은 그 소화 기능의 이상 또는 동맥경화 현상이 있을 때의 수술과 약물 처방에 해당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자유방임주의는 생체의 면역력에만 온전히 기대는 처방전이라고 유추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와 같은 욕망의 해제, 해방이야말로 영국 계몽주의 사회의 본질에 해당한다. 아담 스미스는 이성reason, 합리성ration이란 단어 대신에 도덕을 sense, 즉, 감정, 감각에 연결시킨다.(그래서 the theory of moral sense라고 했다) 감각적 쾌락과 유쾌함, 즉자적 행복에 가중치를 둔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는 인간의 성이 해방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인간의 감정에 솔직해지면서 그것을 긍정하며 인간의 감정적 정체성Identity를 확립하기 시작한 것이다. 종교에서 세속 국가로 이성에서 감정으로의 시대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래스머스 다윈Erasmus Darwin은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다. 그는 주노미아Zoonomia라는 책 등을 통해 후일 그의 손주가 이룬 지적 성취의 토대가 되는 작업을 했다. 그는 생물학을 연구하며 자연계의 경쟁을 관찰하고 사회 진화론의 기초가 되는 주장을 펴게 된다. 아담 스미스가 관찰한 시장 경제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중상주의 시장경제는 중세 봉건 경제로부터 새로운 경제 생태계로의 전환이었을 것이다. 경제의 주체, 지배자가 변화하며 새로운 경제의 생태 질서가 만들어지는 현장을 목격하고 그것에 대한 관찰을 기록한 것이 아담 스미스의 평생의 노고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이 포터의 책은 전문가를 위해서 쓴 책이라 하기에는 너무 산만하고 여러가지이지만 깊이가 없어 보이고 나 같은 layman에는 명료한 임패트가 없다. 따라서 나의 독서는 책의 내용을 정리하기 보다는 읽고 싶었던 내용을 다소 억지로 찾아 내려 했던 것 같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굳이 추천할만한 책은 아니었던 듯 하다.

내가 읽어내려 했던 영국 계몽주의 철학이 올바른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자유주의 경제 철학을 ‘정의’와 동의어로 혼동하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 혹은 결론을 갖게 되었다. 번영과 풍요에 이르는 경제라는 자연 관찰의 결과물인 것이지 그것을 평등과 연결시키는 것은 완전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신의 축복은 원래 공평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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