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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메이나드 케인스 1

by neofluctus 2024. 3. 24.

존 메이나드 케인스

영국의 경제 사학자 로버트 스키델스키가 쓴 존 메이나드 케인스의 2권짜리 전기 중 첫 번째 책이다. 고세훈 교수가 번역하고 휴머니스타스에서 2009년에 출간했다. 번역이 아주 잘된 책이다. 역자의 서문을 읽어 보니 이 책은 원래 3권짜리를 40%정도로 줄여놓은 축약본의 번역이라고 한다. 그래도 여전히 상당한 부피를 과시하는 책이지만 작가의 글솜씨, 그리고 번역이 훌륭해 아주 수월하게 읽을 수 있다.

본격적으로 그의 경제 이론이 탄생하는 배경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케인스의 성장과정, 인간관계, 성적 취향 등 연애에 관한 이야기가 1권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시점, 영국에서 존 메이나드 케인스와 같은 엘리트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는지 그 사회의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그의 먼 조상은 노르만디 윌리암공이 영국을 침공할 때 함께 했던 노르만디 귀족이었다. 이후 그의 가문은 스코틀랜드 왕가를 지지하는 가톨릭이었기 때문에 부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네빌 케인스 역시 수학에 상당한 재능을 가진 캠브리지 대학 교수였다. 존 메이나드 케인스가 캠브리지 대학 킹스 칼라지에 입학하고 대학에서 공부하는 과정 심지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때도 아주 열렬하고 극성스럽게 아들을 채근한다.  

대학 생활에서 그의 지성은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 한 인간의 지적 능력이 한 개인의 성공 뿐만 아니라 인간 역사에 얼만큼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사실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한 세대만에 축적되는 지적 역량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한국 사회와 같이 식민지 사회와 내전을 통해 전통 사회와 분절된 사회적 단층이 있는 세상에서는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사례처럼 보인다. 

남색으로 잘 알려진 그의 성적 취향은 캠브리지 대학의 ‘사도들’이라고 하는 써클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대학은 언제나 그들이 기득권 계층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기성의 권위와 가치에 도전하는 좌파적 성향을 지닌다. 그리고 당시 이 명민한 젊은이들의 아날 취향은 부모 내지 조부모들이 가지고 있었던 빅토리아 시대의 권위주의, 금욕적 세계관에 대해 반항, 저항 또는 조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한편 여성들이 무시되고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남성 중심적 전통 사회의 병리적 현상처럼 보인다. 대학을 졸업한 후 런던의 블룸즈버리 그룹에 참여하고 재능있고 지적인 여성들과의 교류가 시작되면서 하나 둘씩 이성애에 비로소 눈을 뜨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거북스러운 취향에 대해서는 그렇게 이해하고 싶었다. 

한편, 스키델스키는 한국어 서문에서 케인즈 경제학은 단기 고용이론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처럼 성장에 방점을 두는 경제에서의 관심사와는 약간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유효수요 이론이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 시절에 있었던 카드 대란, 소득 주도 성장 정책 등을 통해 한국 사회에 창조적?으로 변용되어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건설을 통한 GDP 상승 전술은 한국 경제의 고전적 케인스 정책의 대표적 운용 사례일 것이다. 그 변용의 의미란 외환 위기 때는 정부가 지출해야 할 비용을 민간에게 떠넘겨 카드 대란이라 불리는 신용 참사로 인해 신용불량자를 대량으로 쏟아낸 것이 그 하나고 두 번째 케이스는 기업과 자영업자에게 덤탱이를 씌운 변태적 총수요 정책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공무원으로서 초임 근무지 인도청, 1차 대전시 재무부에서 근무하지만 기본적으로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로서 또 언론인으로서 정치(국제정치 포함)와 경제 정책에 관여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자였지만 점점 정책적으로 노동당과의 접점이 많아지게 된다. 

1922~1923년 영국은 디플레이션, 고실업, 고금리라고 하는 영국병에 시달린다. 1차 대전후 생산성에 비해 임금이 지나치게 많이 오른 것 그리고 전후 영국이 금본위제로 복귀하기 위해 파운드당 환율을 4.86달러에 고정시킨 것 등이 문제의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국은 1815년 나폴레옹 전쟁 이후 그때까지 물가, 고용, 이자율 등이 그렇게 무너지는 경험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나 같은 문외한도 통화정책를 통해서 비교적 수월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이해하지만 당시 영국 사회는 금본위제를 일종의 ‘當爲(당위)’라 여기는 신조가 있었고 금융 중심지로서 영국의 위상을 되찾고 싶은 욕망이 너무나 컸던 것 같다. 반면, 케인스는 환율보다 가격 안정이 통화정책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일단, 국내 정세가 안정이 된 다음 자유주의 무역 정책으로 관심사를 돌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고용의 불안정은 바로 혁명과 같은 사회적 불안으로 연결되어 볼세비키 혁명과 같은 사회적 격변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의미처럼 읽힌다. 

많은 정책 결정자들이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는 해법을 찾았지만 케인스는 가격, 특히 임금의 비탄력성, 粘性(점성)sticky을 주장하면서 금본위제의 포기와 같은 통화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유명한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임금을 깎는 것이 아니라 인플레이션을 통해 임금 상승분을 상쇄시켜 기업의 매출을 증가시켜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견조한 인플레이션을 자본주의의 정상성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반면, 디플레이션 상황에서 사람들은 가격이 떨어질 것을 예상해 구매를 늦추게 되며 기업의 매출은 감소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뿐만 아니라 이때 전통적 화폐수량설에서처럼 돈을 많이 푼다 해도 가격은 오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격의 상승은 화폐의 총량이 늘어도, 가격이 오르지 않을 것이란 사람들의 기대하에서는 화폐의 유통이 지체되는 退藏퇴장 효과가 생겨 화폐 유통 승수를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퇴장된 돈이 저축이 되고 그 저축이 투자로 연결된다는 전통 가설에도 반대한다. 투자는 기업가들의 animal spirit이 결정하는 것이지 저축의 양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튼, 화폐수량설에 화폐의 유통속도를 더한 개념이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중앙은행을 중심으로 운용되는 통화 정책과 같은 현대 거시경제학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임금을 시장의 가격 결정 구조에서 파악했던 고전 경제학자들의 관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시장이란 개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과 노동간의 위계적 사회경제적 관계를 은폐시킬 수 있는 대단히 중립적, 객관적, 그리고 과학적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임금 하락과 실업은 존재론적 위협이고 일종의 사회적 살해에 해당할 수 있다. 통화정책을 통한 견조한 인플레이션 정책은 시장의 승자 독식 메커니즘을 완화 또는 우회할 수 있는 20세기 새로운 발명이라고도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사회주의 사회의 경제적 관계도 불평등하다. 프리드먼이 주장했던 것처럼 기본적으로 공산주의 사회는 당 또는 사람이 그 경제적 관계를 결정하고 자본주의 사회는 시장이 그것을 결정한다. 시장 가격은 운명 또는 팔자 소관으로 그 의미의 외연을 확장시킬 수 있는 형이상학적 담론으로 치환될 수 있다. 사회주의 경제는 유해한 작위일 뿐 자본주의의 풀평등은 무위적 자연이라고 합리화된다. 그러나,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과연 그 사회를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인민이 세상에는 백분위 확률적으로 얼마나 될까? 경제학과 사주팔자가 헷갈리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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