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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사기) 列傳(열전) 2

by neofluctus 2024. 3. 21.

과학동아에서 인용

漢(한)나라의 건국이 사기열전을 1권과 2권으로 나누는 기준이 된다. 주로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난세를 거쳐 한나라가 건설되기까지의 과정이니 만큼 1권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묘사는 대단히 드라마틱하다. 반면 2권은 한고조부터 한무제까지 秦漢(진한)의 통일 제국이 완성돼가는 수성과 안정기의 인물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그래서 1권의 내용은 한국 사람들에게 익숙한 내용이 많고 흥미롭다.

진시황이 창시하고 한무제가 완성한 중앙집권적 관료제에 기반한 帝王制제왕제는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왕조가 무너질 때까지 2000년간 지속되었다.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라고 하는 공화국이 탄생한다. 중국에서 ‘共和(공화)’란 단어의 출현은 사기에서 周(주)나라가 東(동)주에서 西(서)주로 천도하며 주나라 왕실이 무너져 귀족들이 통치하던 혼돈의 시대를 지칭한다. 그리고 이 단어는 중화민국 출현 이전에 이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것 같다. 그만큼 중국의 정치 전통에서 서양의 republic이라는 단어에 상응시킬 수 있는 개념이 없어 궁여지책으로 끄집어 낸 용어가 공화 또는 공화제였다. 

사기 2권에는 酷吏列傳(혹리열전)이 있다. 혹리의 혹자는 가혹하다는 뜻이다. 제왕제와 같은 정치 체제가 안착하기 위해서는 법가 사상에 따라 혹독하게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중국의 정치 체제는 부침이 있기는 했지만 이런 관료제를 바탕으로 광대한 제국 체제를 2000년간 지속할 수 있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한무제 이후 중국에서, 관료가 아닌 서양 사회와 같은 의미의 귀족은 없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때문에 송대 이후 출현하는 독서인 또는 사대부 계급의 사회적 포지셔닝이 독특해 보인다.

개인적으로 2권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흉노열전이었다. 이 흉노가 서양사에서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야기한 원인이 맞다면 그들의 역사적 실체가 더욱 궁금했기 때문이다. 또 일본의 동양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한나라가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서역으로부터 汗血馬(한혈마)를 수입하며 지나치게 많은 돈을 지출했기 때문에 무역 역조가 심해지고 쇠퇴하게 되었다는 분석을 했었다. 한무제는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장건 등을 보내 대원, 월지와 같은 중앙 아시아 국가들과 관계를 맺으려 한다. 하지만, 흉노의 힘이 너무 강해 그들과 함께 흉노를 협공하려는 계획은 실패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 중앙 아시아 국가들을 공격하고 항복을 받아 내는 선에서 원정이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때 중앙 아시아 정벌에 일종의 건달 또는 범죄자 집단들을 동원하게 된다. 그만큼 서역 원정이 위험하고 거칠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15세기 유럽에서 전개된 지리상의 발견과 모험 때의 해적 상인들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한무제는 서역 경영에 관심이 많아 재위 기간 내내 흉노를 제압하기 위해 전국가적 역량을 동원 했다. 초원 지대 뿐만 아니라 그 아래 실크로드 그리고 사천 지방 등을 비롯한 남서 지역 등 다방면으로 서방과의 교역로를 찾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 고대 제국이 바다가 아닌 육지를 통해 제국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시도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하지만, 무역이 역조였다는 사실은 흉노 정벌의 성격이 돈이 되어서라고 보다는 단순히 흉노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성격이 더 강했다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영리를 목적으로 했지만 단순히 손해보는 장사였을뿐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산업 혁명 이후 서양 제국주의와 그 팽창이 대단히 특출한 것은 맞지만 동양사를 찬찬히 들여다 보면 그 어떤 역사적인 전개도 일방적으로만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또 중앙 아시아를 비롯한 스텝 및 중근동 민족들은 유럽과 동아시아 문명의 훌륭한 중개 문명 또는 거간 문영이었다는 사실도 꼭 기억해야만 할 것 같다. 흉노의 존재는 동아시아, 중근동과 중앙 아시아 문명, 유럽 문명이 각각 독립적으로 다양하게 발전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신의 섭리는 아니었을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19세기 중반 이후의 역사가 중국을 劣勢(열세)와 守勢(수세)로 몰아 넣은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 중국이라는 나라가 갖고 있는 영토적 방대함과 인구 규모는 분명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는다. 미중간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고 서방의 언론은 중국의 권위주의 체제 때문에 중국이 아편 전쟁이후와 같은 상황으로 회귀할 것처럼 선전을 하지만 그런 시각에 액면 그대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중국의 성장은 미국의 오판으로 인한 중국의 WTO가입 그리고 금융위기로 인한 미국 내부의 혼란이 결정적이었다.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미국에서 야당 대통령 후보에 대한 온갖 종류의 사법적 기소와 재판은 미국 민주주의가 얼마나 위선적이고 기만적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의학과 예방 의학이 이렇게 발전한 21세기에 팬데믹이라는 기현상도 여전히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전세계적으로 빈부의 격차는 심화되고 민주주의는 퇴행하며 권위주의 체제가 곳곳에 발호하는 것은 분명 주목해야만 하는 새로운 조류다. 

사기의 구성은 본기, 세가, 열전 이외에도 表(표)와 書(서)가 있다. 서에는 禮(예)서와 樂(악)서가 있고 보통 禮樂(예악)이라고 묶어서 표현을 한다. 보통 百姓(백성; 백 개의 성을 말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姓성은 주나라 왕족만이 쓸 수 있는 성씨였다. 그러나 이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러 가문을 지칭하는 단어되고 나아가서는 모든 인민을 지칭하게 되었다. 人民(인민)이라는 단어의 ‘인’자는 지배계급을 의미하고 ‘민’자는 한자의 상형자 해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같이 눈을 멀게 하는 노예를 의미했다 )을 교화하는 수단으로 ‘예’와 ‘악’이 함께 사용되었다. 생각해보니 오늘날에도 음악이 없는 세상은 정말 상상하기 힘들다. 그리고 중국 고대 사회의 지배계급이 국가의 통치 수단 또는 선전 수단으로 ‘음악’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사기의 악서에는 이미 서양과 같은 12음계가 이 때 출현한다. 특히 진시황을 암살하고자 했던 연나라의 형가가 그 장도에 오르기 전 羽調(우조)라는 노래를 부르는 데 번역자 신동준 선생이 악서의 음계에 대해 자세히 주석을 달고 있다. 

일반적으로 음정을 계량하는 방법은 서양에서는 하프 현의 길이를 통해서 측정했고 피타고라스 등에 의해 수학적으로 그 원리를 구현해 낸다. 중국도 마찬가지로 거문고와 같은 현악기의 길이를 통해서 그 음정을 계량화했던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12음계는 수학이 아니라 음양오행설에 의해 구성되고 있어 이후 음악 이론의 발전 궤적을 다르게 만드는 것 같다. 그렇지만 12음계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화성 또는 화음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있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서양의 클래식 음악과 같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싸움과 법정 공방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예의를 지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가의 禮治(예치)는 분명 대단히 잘 고안된 선진적 국가 통치 이념이었다. 한무제가 유가를 국학을 채택 유가는 이후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의 독점적 지배 이데올로기가 된다. 書(서)는 훑어보기만 하고 다 읽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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