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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사기 本紀본기

by neofluctus 2024. 3. 12.

위즈덤하우스에서 출판한 사마천의 이 史記(사기)는 신동준 선생이 번역했다. 일반적으로 중국의 역사서는 서술 방법에 있어서 사마천의 사기와 같은 紀傳體(기전체)와 사건과 인물 등을 연대기 순으로 적은 編年體(편년체)의 형식으로 크게 나뉜다. 사마천의 사기는 기전체 史書(사서)의 古典(고전)이고 典型(전형)이 된다.  크게 제왕을 기록한 本紀(본기), 封(봉)국들에 대해 기록한 貰家(세가), 연대기로서의 十表(십표), 제도에 관한 八書(팔서), 인물들에 관한 기록인 列傳(열전)으로 구성된다. 그 本紀본기와 列傳열전을 따서 기전체라 하며 오늘은 그 본기에 대한 내용이다. 이후 중국의 사서는 사마천의 기술 방법을 절대 뛰어 넘지 못하고 이것을 답습한다. 현대의 기준으로 보아도 여전히 신박한 편제처럼 보인다.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에 태어났고 고조선을 침략한 한무제와 거의 동시대 사람이다.

신동준 선생은 사마천이 유가적 사관에 가장 덜 오염된 역사가였다고 평한다. 그리고 사서오경 중의 하나였던 書經(서경)이 僞書(위서)라는 사실도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당대에도 유학자들은 있는 그대로의 史實(사실)에 입각해 기술한 이 사기에 대해 다소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12세기 朱子(주자)가 등장 명분론, 정통론적 역사관에 집착하게 되고 그것이 조선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역사관으로 고착화되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사마천은 전통적인 사농공상의 사회 질서에 반해 누구나 힘써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자가 되면 왕후장상이 부럽지 않게 살 수 있다고 하는 실사구시의 세계관을 2000년도 훨씬 전에 표출하고 있다. 유방의 본기에 앞서 항우의 본기를 먼저 편제한 것 그리고 유방의 아내 여태후의 통치를 열전이 아니라 여태후본기로 기술한 점 등이 현실주의자로서의 사마천의 면모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본기는 오제부터 한나라의 한무제까지의 시기의 제왕들에 대해 기록했다. 夏(하)나라에 관해 신동준 선생은 그 역사적 실체를 부정하고 중국의 역사 시대는 殷(은)나라 즉 商(상)왕조부터 시작되었다고 단정한다. 은나라는 홍산 문화와의 연관성 때문에 더욱 관심이 깊다. 은나라는 청동기 문명이었고 그 청동기 문명의 난숙함 때문에 철기 문화를 수용하는 데 늦어져 주나라와의 경쟁에서 패했다고 한다. 이곳에서도 승자의 저주가 적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은나라를 멸망시킨 周(주)나라 그리고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하는 秦(진)나라 모두 서쪽으로부터 출현한 세력들이었다.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문화적 일원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중국의 고대사는 서역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뒤늦게 발전하기 시작했다는 설에 심증을 굳히게 한다. 

중앙집권적 관료제로서 帝王制(제왕제)라고 하는 정치 체제는 시황제가 만들고 한무제가 완성했다. 조선 역시 이와 같은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강고하게 구축한 사회였다. 뿐만 아니라 중국은 1911년 신해혁명에 의해서 이 체제가 해체될 때까지 2000년간 뿌리 깊게 존속해 왔다. 현재 중국 공산당 체제도 전통적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연장 선상에 있다고 파악해도 무방할 것이다. 중앙집권적 관료제로서 제왕적 정치 체제라는 역사적 각인은 중국 인민의 의식, 무의식에도 깊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1911년에서 신해혁명에서 1949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기까지의 시간은 중국의 유구한 역사에서 볼 때 정말 찰나의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인의 의식 속에 자유주의 이념이 들어가 숨쉴 수 있는 공간과 여력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신동준 선생은 이 제왕제에 대해서 부정적이다.

중국은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서구식 자본주의 발전 모델을 포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만의 독자적 역사적 발전 경로를 밀고 나가기로 한 것 같다. 하지만, 명나라처럼 시장 경제를 포기하거나 쇄국 정책을 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국가 자본주의와 같은 공산당 일당 독재를 강화한 것이고 제왕제의 새로운 변형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여전히 세계 경제는 중국의 제조업 경쟁력을 대체할 수 있는 국가를 찾지 못하고 있다. 

문명이 획일화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일론 머스크도 그와 비슷한 주장을 했다. 예를 들어 이슬람 문명이라고 하는 서구와의 이질적인 문명이 없었다면 중세에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전 고대의 지식이 서구 기독교 문명권에 전달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트윗을 날렸던 것 같다. 마찬가지로 공자도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 그렇게 천대를 받고 무시를 당하다 중국의 개혁 개방이 성공하고 난 뒤 공자학원 등의 이름으로 재창조 중국적 가치라는 소프트 파워를 세계에 선전한다. 또, 한자도 마찬가지로 대표적인 자기 멸시의 상징이었지만 그 한자가 있었기에 한나라와 같은 통일제국의 역사가 수 천년 유지되고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 문화와 교양의 중요한 원천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사마천의 사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며 각종 고사 및 그 성어의 출처를 확인하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 중의 한 가지인 것 같다. 한국은 서구 해양 문명과 중국 대륙 문명을 적절히 조합할 수 있는 최적의 반도 국가의 운명을 타고 났기 때문에 제3의 문명 창조도 가능할 것이다. 때문에 동양사에 대한 관심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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