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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VI

by neofluctus 2024. 3. 7.

움베르코 에코가 기획한 서양의 중세 역사서 그리고 시공사가 번역 출판한 4권의 책 중 마지막 4권에 해당한다. 시기적으로 15세기 전후에 해당하는 이 시대는 서양이 중세에서 근대로 그 사회적 성격이 질적으로 변화하는 국면이었다. 이 전환기의 세계사적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왜냐하면 문명의 주변부였던 서유럽이 세계사의 중심으로 부상해 마침내 그들의 근대 문명을 통해 세계를 장악하고 지배하게 되었으며 21세기의 세계 질서를 여전히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라는 의미는 다양한 의미로 규정될 수 있겠지만 15세기 유럽 사회의 변화 중 가장 주목해야 할 그 현상은 소위 ‘근대 국가’의 출현이다. 국가 조직이 왕족 또는 귀족과 같은 계급적 배경이 아니라 기능과 전문성을 중심으로 탈계급화, 왕 또는 국가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것을 말한다. 稅制(세제)와 같은 행정, 사법, 軍制(군제), 교육 등에서 중앙집권적 제도가 정착되기 시작한다.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국가와 시장을 대립적인 개념으로 대치시키지만 중앙 집권적 근대 국가가 출현하지 않았다면 근대 자본주의는 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강력한 국가 권력이 공권력을 통해 시장에 법치 질서를 제공했기 때문에 비약적 자본주의 발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유럽의 국민국가의 정치지형이 이 시기에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영국과 프랑스는 14-15세기에 걸쳐 ‘백년전쟁’을 하면서 각각의 절대 왕정 체제로 발전하게 된다. 또 독일에서는 14세기 이후 합스부르크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세습적 지위를 획득하는 관행이 만들어져 중동부 유럽의 정치적 실세로 등장하게 된다. 또 독일 기사단은 발트해 연안 지역에서 슬라브 이교도에 대한 십자군 전쟁을 전개, 그 지역을 기독교화하며 이후 프러시아 왕국의 토대를 마련한다.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1492년 마지막 이슬람 왕조인 그라나다가 기독교인들에게 정복되면서 리콩키스타가 완결되고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이 결혼을 통해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된다. 이탈리아는 밀라노 공국, 토스카나 공국, 베네치아 공화국, 교황의 교회 국가, 나폴리 왕국으로 분열, 5국지가 전개되며 독일, 프랑스, 에스파냐의 각축장이 된다. 시칠리아는 아랍, 바이킹, 에스파냐 등과 같은 외부 세력의 지배가 중첩되는 역사적 배경을 갖는다. 

가톨릭 교회는 11세기 그레고리오 교황의 개혁 이후 세속적 군주 국가로서의 입지를 계속 유지 강화하며 교황은 프랑스 혁명 때까지 가톨릭의 수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세속 군주로서의 지위를 휘두르게 된다.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과 교황의 세속 군주화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필연적 인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단으로 단죄하며 종교 재판을 통해 교회 권력에 대항하는 목소리와 세력을 억압, 탄압하는 것이 노골화, 일상화하기 시작한다. 

중국 고대사에서 진나라의 통일과 같은 제국의 통일과 달리 유럽은 고대 로마의 멸망 이후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춘추전국시대'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일과 분열에는 각각의 장점과 단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인도 亞(아)대륙이 영국에 식민지화 되는 과정은 인도 아대륙에 통일된 정치 체제가 부재했기 때문에 수 백년에 걸쳐 다윗이 골리앗을 정복하는 것과 같은 영국 제국주의의 식민지화가 가능했다. 반대로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통해 에도 막부의 봉건제를 극복하고 근대 국가 체제를 수립한 것 역시 서양 제국주의를 물리치고 오히려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었다. 하지만,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그리고 일본의 전국시대가 각국의 경쟁을 통해 경제, 문화 등에서 비약적 발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분열과 경쟁의 또다른 긍정적 측면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 맥락에서 동서양사를 비교할 수 있고 EU의 비전도 가늠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1085년 톨레도의 정복은 전유럽에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랍 열풍을 불러 일으킨다. 르네상스라 통칭되는 서양 중세의 각성은 이 톨레도에서의 사건과 매우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15세기에도 아랍으로부터 전해진 이 고대와 아랍의 지식을 흡수, 소화시키는 과정은 여전히 진행중이었다. 다만,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 의한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가톨릭 유럽에 상당한 충격을 준 것이 분명하다. 

리콩키스타와 십자군 전쟁은 유럽이라는 자의식의 각성과 함께 타문명에 대한 유럽의 후진성을 동시에 자각하며 전개된 외부 세계로의 진출 시도였다고 생각된다.(바이킹의 정복 성공처럼 모험과 항해는 이후 유럽의 가장 중요한 세계 전략으로 자리잡았다고 생각된다. 서양 사회를 이해할 때 반드시 이 모험과 항해의 가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몽골의 침입과 이슬람의 출현에 이어 오스만 투르크에 의한 지중해 중계 무역의 독점은 유럽의 실존적 위기였음에 틀림 없었을 것이다. 그 후진성에 대한 자각이 아랍과 고전 문명의 지식을 더욱 열성적으로 습득하고 체화하게 하는 강력한 동인이었음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하게 된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이후 서유럽에서 적어도 표면적으로 이슬람 문명에 대한 수용, 예찬 등의 언급은 사라진다. 그리고 유럽은 르네상스를 통해 전수받은 지식들을 폭발적으로 재창조해내기 시작한다.

동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러시아가 그 적통의 계승자로 ‘제3의 로마제국’이 되었다는 동로마 제국 이양설이 만들어진다. 동로마 제국의 쌍독수리 문장을 러시아가 물려받아 사용하고 그리스정교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는 제3의 기독교 문명 국가로서의 역사적 포지셔닝이 이때 이루어진다. 이후 르네상스, 종교개혁과 같은 서유럽의 역사발전 과정과 괴리된 러시아만의 역사가 전개되고 러시아의 정체성이 확정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누가 뭐라 해도 15세기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인들에 의해 창조되었다. 오늘날 엔지니어라는 호칭에는 일종의 경의와 존중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15세기 이전 유럽에서도 동아시아의 士農工商(사농공상) 사회처럼 천민의 위치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소위 직인, 장인, 기술자의 사회적 위치는 역시 허드렛일, 부차적 중요성을 갖는 직업의 의미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자연철학은 자연과학이라고 이해하는게 좋다)을 통해 그 기술 또는 엔지니어링에 대한 가치가 재평가되면서 인문주의자, 예술가들이 적극적으로 그런 종류의 일과 지식에 개입하게 된다. 각각의 자연현상, 기계적 현상들에 아주 정교한 그래픽과 함께 공학적 자연과학적 지식을 결합시킴으로서 역사의 새로운 혁명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장인들은 이제 스스로를 지식인, 예술가라고 규정하기 시작한다. 독일은 군사 무기 분야에서 공학적으로 크게 기여한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전 부터 포루투갈은 서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노예무역의 경제성을 충분히 이용하기 시작했다. 또 동유럽으로 확장을 통해 그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동식물, 광물 자원 등에 대한 지식이 늘어났다. 이 새로운 발견은 고전 텍스트를 맹신하며 과학 지식의 유일한 원천으로 삼던 중세의 관행을 깨고 과학적 방법론이라는 혁명적 사고 방식을 만들어 낸다.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의 수도사 로저 베이컨이 제창한 것과 같은 경험에 기초한 귀납적 결론 그리고 그것을 다시 연역적으로 추론, 이론적으로 일반화시키는 근대적 과학의 사유 체계가 이때 만들어진다. 

서양 중세 사회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서양의 근대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서양의 근대를 이해하려는 주된 목적은 서양의 근대가 동아시아의 근대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의 조선 식민지화와 한일간의 긴장관계 그리고 미중간의 대치를 둘러싼 동아시아의 정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연혁을 서양 중세로까지 확장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의 동양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문화 일원론'을 주장한다. 즉 다시말해 인류 문명 始源(시원)의 다원성을 부정하고 메소포타미아에서 인류의 문명이 시작되고 그것이 동서로 퍼져 나갔다고 파악한다. 그중에서도 지리적 물리적 이유때문에 동아시아는 가장 늦게 출발한 문명이라고 이해한다. 반면, 중세 사회 뒤에 근세와 근대 사회라는 새로운 시대 구분 개념을 통해 11세기 중국 송나라에서 처음 근세 사회가 출현했다고 본다. 근대는 산업혁명 이후의 시기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중세는 동아시아의 세계사적 영향력이 더 크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도 중국은 明朝(명조)에 들어서 이민족 元朝(원조)에 대한 민족주의적 반감 때문에 쇄국주의 퇴행을 선택, 중국이 근대로의 이행을 지체시켰다고 본다. 따라서 시진핑 집권 이후의 중국 사회를 전망할 수 있는 중요한 관점의 포인트를 발견할 수 있다. 

19세기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그리고 20세기 초 조선의 식민지화는 모두 서양의 팽창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일본의 근대화는 유일한 비서구 국가의 근대화의 성공이었다. 한국과 대만, 중국은 일본 성공 모델의 충실한 계승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은 시간이 지나 한국 사회에서는 일본의 근대화의 중요성을 잊거나 너무 쉽게 과소 평가한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발전과 중국의 개혁 개방 이후의 발전과정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풍조가 팽배해 있다. 이런 몰상식과 몰이해가 너무 슬프다. 이런 몰상식과 몰이해가 우리 사회의 발전을 정체시키고 더 나아가 비극적 결말에 이르게 될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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