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일 현대사

by neofluctus 2024. 2. 15.

Detrich Orlow는 독일 함부르크 출생 미국의 역사학자다. 미국 보스톤 대학에서 30년 넘게 가르치고 연구한 학자로 알려져 있다. 미지북스란 곳에서 출판했고 문수현 선생이 번역했다.

독일은 역사상 최초로 1871년에 통일 국가가 되었기 때문에 그 이후의 역사가 독일 현대의 全史(전사)에 해당할 것이다. 독일의 근대화, 일본의 메이지 유신 그리고 한국의 근대화 사이에는 일정한 내적 맥락이 있을 것 같다는 심증을 굳히고자 이 책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런 선택의 동기를 확인할 만한 내용을 찾기는 어려웠다. 대신, 독일 전체주의의 출현과 냉전 종식과 함께 찾아온 독일의 재통일과 그 과정에서 한반도 재통일과 관련한 시사를 찾을 수 있었다. 물론, 훌륭한 학자를 통해 독일 현대사를 개관할 수 있었다는 것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독일 공산주의 운동사를 개관할 수 있었다. 칼 마르크스는 유대계 독일인이었고 독일은 과학적 공산주의의 元祖(원조) 국가다. 실제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초기 독일의 사회민주당의 핵심 지도자 및 정신적 지주였다. 사회민주당은 의회주의를 지향했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 즉 인민 민주주의를 실현을 통해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를 과학적이라 주장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내적 논리에 의해 자본주의는 스스로 괴멸하고 공산주의로 이행할 수 밖에 없다고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엥겔스의 사후 엥겔스의 지적 재산권 관리자였던 사민당 지도자 에두아르트 베른쉬타인은 마르크스 엥겔스에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즉, 자본주의는 붕괴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직시하기 시작했고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개혁’적 사회주의 운동 이론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모두가 다 아는 것과 같이 현대 유럽의 좌파는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노선을 기본 강령으로 채택하고 있다. 이에 대해 로자 룩센부르크, 칼 카우츠키 등은 베르쉬타인의 수정주의에 반대 정통 마르크시즘을 옹호한다.(여기서 다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주장했던 카우츠키, 로자 룩셈부르크와 달리 레닌은 볼셰비키라고 하는 혁명 전위가 이끄는 일국 사회주의 노선이 정답이라고 주장하며 분열한다. 아니 볼셰비키 이외의 노선을 숙청한다.)

앞에서 열거한 이 모든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독일 사회가 전체주의 사회로 발전하고 양 차 대전이라는 대참사를 일으켰던 배경에 대해 독일의 시민계급의 미성숙성과 함께 거론되는 원인이 이와 같이 공산주의 운동의 격렬함이었다. 다수의 독일인들과 그 속의 소수 민족 유대인들의 행태를 통해 19세기와 20세기 초 독일 사회를 이해하고 그려보는 데 아주 중요한 단서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다문화주의에 대해서 좀 더 깊은 사려가 있어야만 한다는 역사적 교훈의 예시의 하나에 해당할 것이다.

독일은 영국, 프랑스와 다르게 1871년 이후에나 식민지 경쟁에 뛰어들게 된다. 또한 비스마르크는 일관되게 식민지 경영의 실용적 가치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오로지 유럽 내의 정치 지형과 균형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비스마르크 사후 독일 지배 엘리트는 조심성이 사라지게 되고 영국, 프랑스 등과의 경쟁에 열을 올리게 된다. 또 이 시기는 진화론적 인종주의적 편견이 정점에 달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런 시대적 상황이 독일의 지배계급과 중간 계급의 의식을 편집증처럼 지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 후발 주자였던 독일의 상대적 후진성이 열등감과 교차하며 독일인들의 과도한 자신감과 우월감을 불러 일으켰던 것으로 보인다. (서유럽과 미국 백인들의 인종주의적 편견은 백인 중심의 세계 질서가 종말을 고하기 전까지는 쉽게 치유될 수 없을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칼 카우츠키, 레닌 등이 의회주의를 부정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히틀러의 나치당은 의회를 무력화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는 일본의 군국주의와도 상당히 차별화되는 상황이다. 일본의 관동군이 중일 전쟁을 일으킬 때 적어도 일본의 의회는 그 행위를 사후 추인 하는 등 상대적으로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 나치의 집권 과정과는 비교하기 힘들어 보인다. 즉, 독일의 공산주의 운동과 나치즘은 극단에서 평행적으로 대치, 경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 사회에서도 2010년대 후반부터 일정하게 사회 일각에서 권위주의 내지 전체주의적 흐름이 감지되고 있는 것 같다. 또, 해방 후의 좌우 분열과 같이 극단으로 치닫는 정치적 사회적 혼란에 비견되는 갈등이 재연되고 있다고도 느껴진다. 최근 한국 사회의 좌파는 한국 자본주의의 성숙에도 불구하고 의회주의보다는 전체주의로 경도되는 조짐들을 보이고 있다.

냉전의 종식 후 독일의 통일에 대해 영국과 프랑스는 반대했지만 미국과 러시아는 동의했다. 러시아는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과 함께 약간은 이상주의에 들떠 있었던 것이 분명하고 미국은 독일의 통일이 유럽 내에서 그리고 러시아와의 세력 균형에 도움이 된다는 현실적 판단을 했을 것이다. 

독일은 세계 2차 대전 패전 이후에 비로소 명실상부한 선진 자본주의, 선진 민주주의 국가로서 자리 매김하게 된다. 이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마샬 플랜과 같은 유럽에 대한 미국의 전후 복구 지원 계획 덕분이다. 미국은 세계 패권국으로서 여러 이유 때문에 욕받이를 하고 있지만 인류 역사상 매우 특이한 유형의 제국 경영을 해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1815년 나폴레옹의 패전부터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있기 까지 평화의 시기를 보낸 것처럼 1945년 종전 이후 현재까지 상대적으로 긴 시간 평화 속에 살아 온 것 또한 사실임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처음 통일에 대해 동서독 모든 독일인들은 낙관적 미래에 매몰되어 있었다. 하지만, 다 아는 것과 같이 장미빛 미래에 대한 기대감과 달리 통일 독일의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생각처럼 쉽게 동독 경제와 생활수준은 서부 지역의 동포들을 따라갈 수 없었고 그 격차와 실망감으로 인한 갈등과 불만, 고비용 등 악순환의 연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현재 한국 사람들이 통일에 대해 회의적 시각을 갖게 된 배경에는 독일 통일의 이 같은 先驗(선험)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런 우여곡절을 거쳐 많이 안정화되고 있다고 보여진다.

한반도의 통일은 영호남의 갈등을 넘어 關西關北(관서관북)의 갈등 같은 또 다른 양태의 사회적 긴장과 마주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통일은 큰 기대감 없이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독일의 경험을 반면교사로 좀 더 조심스럽고 세심한 계획과 준비가 가능할 것이다.

한국과 중국의 갈등 기저에는 세계 경제 공급 사슬에서 한국과 중국의 업종이 겹친다는 사실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 한국은 중국,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왜소한 내수 시장을 갖고 있다. 이러한 현실적 이유 때문에 한반도의 통일은 대단히 설득력이 있다고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한국의 통일은 민족적 애국주의적 열정과 낭만은 결여된 채 건조하게 느껴지는 현실적 이유들만 나열하고 있는 것 같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세 II  (1) 2024.02.25
중세 I  (0) 2024.02.21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Capitalism in America  (0) 2024.02.06
유전자 로또: 왜 DNA가 사회적 평등에 중요한가?  (1) 2024.02.02
만주모던  (1) 2024.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