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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재밌어서 잠 못드는 해적의 세계사

by neofluctus 2023. 11. 15.

2023. 2. 27 '생각의 나무'에서 출판되었다.

일본의 정치학자 竹田いさま(다케다 이사마)가 쓰고 2013년 5월에 世界を動かす海賊(세계를 움직인 해적)이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처음 출간되었다. 책을 읽을 때는 다케다 이사마가 서양사학자라고 오해했다. 정치학자로써는 이례적인 내용의 책을 썼기 때문이다. 작가 본인도 정치학자로서 금기시 되는 역사책을 내게 된 것에 당혹스러워 하는 所懷(소회)를 후기에 적고 있다. 나도 後記(후기)를 읽고 나서야 그가 국제 정치학자인 것을 알게 되었다. “너무 재밌어서 잠못드는 해적의 세계사”란 다소 가벼워 보이는 국내 번역서 제목은 자칫 이 책이 담고 있는 진중한 함의를 파악 못하고 애들이나 읽는 가벼운 책처럼 보이게 될까 봐 걱정이 된다. 그만큼 이 책은 팍스 앵글로색스나(Pax Anglosaxna)라고도 규정할 수 있는 근대 이후의 세계질서를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참고서 될 수 있을 것 같다. 

유교의 ‘大義名分(대의명분)’을 중요한 정치윤리로 생각하는 동아시아 국가들(특히 한국은 더욱 명분에 원리주의적으로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에게 해적질을 통해 브리타니아 제국의 초석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충격적이고 쉽게 도덕적 분노를 유발할 수 있을 것 같다. 칼 마르크스는 서구 사회의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질서가 상업혁명을 통해 본원적 자본축적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분석했지만 브리튼 제국에 있어서는 해적산업이 그 역할을 대신한 것처럼 보인다. 모헙상인, 탐험가, 모험가 등이 모두 해적들을 표현하는 또다른 말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니 뎁이 주연한 디즈니 영화 “캐러비안의 해적”은 전형적인 가족 영화다. 우리 역사에서 ‘海賊(해적)’이라 하면 倭寇(왜구)를 쉽계 연상하게 되고 그 부정적인 이미지를 쉽게 탈색시킬 수가 없다. 그런데, 어째서 서양인들은 바다의 양아치들에게 그렇게 많은 애정과 로망을 갖고 있으며 그들에 대한 내러티브를 끊임없이 생산해 내는 것인지 의아했다. 

1920년대 영국 왕립박물관 자료실에서 16세기 후반 ‘천일의 앤’으로 유명한 '앤 블린'과 헨리 8세의 딸, 엘리자베스 여왕이 이 해적질에 적극적으로 관여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적 전략 사업으로 육성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기록들을 발견하고 나서야 캐러비안 해적들의 실체가 역사의 렌즈에 포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모두가 다 아는 것처럼 헨리 8세가 스페인 왕가 출신 왕비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블린과 재혼을 했으며 그 결혼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반대 때문에 종교개혁을 했다고 알고 있다.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오른 뒤 가톨릭 세력이 지배적이었던 대륙의 스페인, 프랑스, 교황청으로부터의 위협은 이 독신 여왕에게 항상 존재론적 위협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영국은 스페인에 비해 2, 3류의 국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압도적인 적들로부터 왕위를 지키고 국가를 보존하는 일이 쉽지 않았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가장 수익이 컸던 해적질은 신대륙으로부터 金銀(금은)을 실어나르는 스페인과 포루투갈 배에 대한 襲擊(습격)과 掠奪(약탈)이었다. 이 같은 해적활동은 게릴라전과 용의주도한 스파이 활동을 통해 이루어졌다. 여기서 중심이 되는 해적은 프란시스 드레이크 또는 호킨스가 주요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런 영국과 스페인의 해상경쟁은 1588년 아마다 해전에서 정점을 이루는 데 영국의 해군-해적 혼성부대는 도버 해협의 거센바람 등을 이용한 火攻(화공)으로 스페인 함대를 격파하게 된다. 게릴라전, 스파이활동, 그리고 화공작전 이 세가지가 영국해적이 보다 더 강한 적, 스페인과 싸워 이길 수 있었던 중요한 秘策(비책)이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비책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 당시 영국 사회에 이 같은 여왕의 결단(해적산업 육성)에 대해 영국의 지배계급 구성원들 사이에서 擧國一致(거국일치)의 합의, 컨센서스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Under Dog가 Top Dog를 깰 수 있는 방법은 기존의 룰을 따르는 것으로 절대 가능하지 않다. 바로 해적질이라는 신의 한 수가 그 비책이 되었을 것이다. 자신들이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자신들이 선택한 시공간에서 싸우는 지혜와 창의성이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했다. 영국이라는 나라, 정말 독특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되었다.

수익의 크기로 볼 때 금은 등의 귀중품 약탈 > 아프리카 흑인 노예무역 > 향신료, 커피, 차 등으로 순서를 매길 수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부터 시작된 노예무역은 공식적으로 1807년에 끝났지만 실제로는 1844년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270년간 천만 명의 흑인 노예가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으로 移送(이송)되었다. 맨처음 노예무역은 포루투갈이 독점을 했다. 하지만, 곧 영국은 스페인의 금은을 노략질하는 방식으로 노예선을 약탈, 노예들을 빼내서 신대륙의 스페인 사탕수수 농장주들에게 팔아 넘기는 노예 密貿易(밀무역)을 시작한다. 노예무역도 부족해서 그것을 또 밀수한 것이다. 해적 호킨스는 여왕의 인가를 받고 서아프리카 기니아 만을 중심으로 한 직거래에 뛰어 들지만 쉽게 그 노예 무역의 유통경로를 확보하지 못해 애를 먹는다. 결국, 이 흑인 노예들의 공급 원천은 다름 아닌 아프리카 부족간의 전쟁의 산물이란 사실을 알게 되고 아프리카의 지배세력, 왕들과의 결탁을 통해 흑인 노예들의 장기적, 안정적 공급원?을 확보하게 된다.

영국 동인도 회사의 모태는 현재의 튀르키에를 가리키는 지명 레반트, 그 이름을 따라 지은 레반트 회사에 있다. 그 지리적 위치가 동서의 가교 역할을 하는 것처럼 레반트 회사는 중개무역을 통해 나름 짭짤한 수익을 영국 왕실과 투자자들에게 제공했던 것 같다. 그런데 영국도 희망봉을 따라 인도, 동남 아시아의 직항로를 개척하면서 직거래를 하고자 시도하고 그 결과물이 동인도 회사의 설립으로 이어진다. 인도의 동인도 회사가 워낙 유명하고 독점적이었기 때문에 그 밖의 회사는 거의 없는 줄 알았는데 상당히 많은 수의 회사들이 설립되고 사라졌다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후추 등의 香辛料(향신료)는 말 그대로 조미료로서의 역할보다는 ‘의약품’으로서 효용성 때문에 영국과 유럽의 지배계급에 크게 어필했다는 것을 새롭게 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한약재 등도 유럽에서 근대 의학이 본격화 되기 전까지 상당한 인기를 구가했던 것을 알게 되었다.

한때, 영국은 茶(차)의 나라가 아니라 커피의 나라였다. ‘모카커피’란 에티오피아의 커피가 예멘의 모카항에 집산되어 유통되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동인도 회사는 모카를 거점으로 커피를 영국과 유럽에 비싼 값에 팔면서 큰 수익을 낼 수 있었다. 그런데, 네델란드의 동인도 회사가 커피 묘목을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가져다 재배에 성공하면서 자바커피를 유럽에 유통시키자 커피 사업의 수익성이 크게 감소한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커피무역'의 독점이 깨지자 대신 茶(차)를 전략 품목으로 밀면서 영국의 차문화가 만개하게 되었다고 한다. 왕실 브랜드를 차 마케팅에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들 해적상인들의 아이디어였다. 특히, 포트넘 앤 메이슨Fortnum&Mason이 대표적 왕실 브랜드 마케팅의 성공사례였다. 스타벅스가 유럽을 침공?하기 전까지 유럽은 커피 보다는 차문화가 압도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영국의 커피문화는 약 100년간 지속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매일 같이 마시는 커피, 차 등에도 관계되는 역사적 내용들이 이 책에는 잘 소개되어 있어 책을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