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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치강의

by neofluctus 2023. 12. 4.

西山 隆行(니시야마 타카유키)著

한국의 현대사는 지정학에 의해 규정되는 측면이 내부적 요인 못지 않게 큰 것으로 보인다. 지난 몇 년 사이 顯像(현상)하는 한국의 정치적 변화는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가 약화되고 중국이 부상하는 국제정치의 역학관계가 한반도에 그대로 투영되는 과정이었다고 분석하면 쉽게 설명이 될 것 같다. 

한국전쟁이후 한국의 기득권층 뿐만 아니라 많은 국민들이 국가안보를 미국에 일방적으로 의지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때문에 미국이라는 나라를 냉정한 분석 대상으로 파악하기 보다는 일정한 선입견과 환상 속에 바라보는 경향이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처럼 보인다. 한국의 좌파들 역시 미국이라는 나라를 단순히 악마적 제국주의라는 프레임 속에 가둬 놓고 전체주의적 사회주의를 합리화하기 위한 선전을 계속해 오고 있다. 최근에 좌파는 우파가 미국에 傾斜(경사)되는 것처럼 중국에 대한 전근대적 조공외교를 하는 듯한 일방적 저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좌우를 막론하고 미국 사회에 대한 인식수준은 똑같이 ‘無知(무지)와 幻像(환상)’의 경계를 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外勢(외세)에 대한 정치인들의 卑屈(비굴)은 莫上莫下(막상막하)처럼 보인다. 이런 事大(사대)는 우리의 지정학적 宿命(숙명)이라고 설명하면 調理(조리)가 있어 보인다. 물론, 그런 조리가 이 불편한 마음을 진정시켜줄 수는 없을 것이다.

페리제독의 일본 방문 이래 중일전쟁 전까지 일본과 미국의 관계는 매우 양호했다. 하지만, 일제가 중국을 독식하려던 중일전쟁은 미국의 태평양 전략에 대한 명백한 誤讀(오독)이었고 그 결과로써 태평양 전쟁의 패전이라는 참혹한 결과가 이어졌다. 일본의 地域史(지역사) 연구수준은 상당한 수준이다. 더구나 2차대전 패전 이후 미국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분석하려는 일본의 노력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닐 것이다.

이 책은 미국정치 연구가 西山 隆行(니시야마 타카유키)가 대중들을 상대로 ‘미국정치의 상식’이라고 이해 될만한 수준의 내용을 책으로 펴 낸 것이다. 예를 들면 대학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한 교양 수업의 미국정치학 개론 수준 정도처럼 보인다. 한국은 아직 미국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정치이론을 흡수하는 데는 열심이지만 정작 미국을 대상으로 한 객관적 연구는 많이 부족해 보인다. 개인적으로 최근 한국사회의 정치地形(지형)의 변화는 중국 변수보다는 미국 사회의 內紛(내분)이 더 크게 작용한 것처럼 보인다. 

미국의 경제, 군사, 과학 수준은 여전히 압도적인 수준이다. 아직까지 외부로부터 도전받을만한 수준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제국이 내부로부터 분열하고 쇠퇴하는 과정은 거의 예외가 없을 정도로 필연적인 역사적 현상처럼 보인다.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첫째, 대통령을 행정부의 수반으로 삼권분립에 기초한 근대적 공화 정치체제는 미국이 처음이다. 대통령제는 영국의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와 비교된다. 의원내각제는 의회가 입법부와 행정부 두 개의 권력을 독점하기 때문에 더 많은 권력이 의회에 집중되는 일종의 과두지배체제라고 볼 수 있는 측면이 있다. 근대적 공화정치체제의 또다른 典型(전형)은 프랑스다. 나중에 프랑스 공화정과 미국의 공화정을 비교해 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해방후 한국이 프랑스 모델을 따른 것인지 미국 모델을 따른 것인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최근에 한국의 정치인들은 의원내각제를 기반으로 헌법 개정을 주장하지만 국민들은 회의적 것 같다. 영국 또는 일본 모두 프랑스 혁명 또는 미국의 독립 혁명과 같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적 변화보다는 위로부터의 개혁이 성공적으로 성취된 나라들이라는 특징이 있다. 한국의 공화제는 2차 대전 이후 미군정의 리버럴한 정치개혁을 통해 이식된 측면이 커 보인다. 

둘째, 미국은 영국과 마찬가지로 의회가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는데 이 또한 권력의 집중을 막기 위한 장치였다. 반면, 한국은 프랑스의 단원제 국회를 택하고 있다. 특히, 상원은 인구비례와 같은 민주주의적 代議(대의)의 원칙이 아니라 인구, 경제력에 관계 없이 모든 주가 2명씩의 상원의원을 내도록 한 것이 미국 건국 설계자들의 고안이었다. 어느 우월적 힘을 갖는 특정 주가 다른 주들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장치이다.

셋째, 원래 미국은 州(주) 중심의 느슨한 연방국가로 출발했다는 사실이다. 중앙집권화된 국가에 익숙한 동아시아 사람들은 The United States of America라고 할 때 States를 단순히 지방자치체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뉴딜 정책 이전까지 연방 정부의 존재감은 대단히 희박했다. 뉴딜정책 그리고 양 차 대전을 거치면서 미국 연방정부의 존재감은 더욱 커졌고 우리가 미국에 대해서 갖는 이미지는 이 때 이후에 형성된 것이다. 미국의 주정부는 상당히 독립적 권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연방 정부의 정책은 주정부의 행정권력에 위탁되어 실행된다. 입법, 사법, 행정 모든 측면에서 주는 독립적 자율권을 갖고 있다. 미국은 국가의 중심이 연방정부 보다는 주정부에 있는 국가라 파악하는 것이 옳다.

넷째, 미국의 정당은 유럽과 같은 綱領(강령) 정당이 아니라 이익집단의 연합체라는 성격을 갖는다. 그리고 미국의 민주당은 뉴딜정책 이후 미국 의회를 지배적으로 장악해 왔다. 남북전쟁 이전 노예제를 기반으로 한 남부의 민주당은 미국 정치에 수세적 위치에 있었지만 뉴딜 이후 기존의 정치구도가 역전하였고 현재에 이르게 된다. 물론, 민주당의 지지기반이었던 백인 중심의 노동자 세력들이 세계화 이후 대거 이탈하면서 기존의 정치지형 구도는 다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다섯째, 1830년대 잭슨 데모크라시의 역사적 내용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 모든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근대국가들의 참정권은 일정한 재산을 갖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었지만 민주당의 앤드류 잭슨이 대통령이 되고 난 뒤, 부르조아들의 경계를 넘어 참정권이 확대되고 이것이 보통 선거의 효시가 되었다.(미국의 $20 지폐를 보면 앤드류 잭슨의 초상화를 볼 수 있다. 트럼프는 이 앤드류 잭슨을 자신의 정치적 롤 모델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반면, 민주당은 앤드류 잭슨을 $20 지폐에서 지우려 하고 있다. 참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보통선거권에 대해서 프랑스 혁명과 비교해서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는 확인이 필요해 보인다. 아무튼, 미국의 정치발전에서 잭슨 데모크라시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여섯째, 미국의 흑인운동은 두 가지 흐름으로 나뉜다. 킹 주니어에 의한 체제 내 개혁으로서 민권운동과 말콤 엑스가 주장한 흑인 내쇼널리즘이다. 흑인 내쇼날리즘이란 흑인 중심의 독립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다소 급진적 주장이다. 아무튼, 1960년대 이후에 미국 흑인들은 참정권을 획득하게 된다. 미국 민주주의를 생각할 때 ‘흑인문제’는 항상 미국 민주주의의 이중성, 모순, 또는 위선을 드러내는 대표적 주제라고 생각한다. 흑인문제를 비롯한 인종차별 문제는 미국 민주주의의 결정적 缺陷(결함)이다. 

일곱째, 미국 정치와 미디어의 관계다. 특히 최근에는 전통적인 미디어 보다 SNS가 미국 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고 있고 이것이 민의를 왜곡하는 경향 때문에 미국민들의 불신감이 커지고 있다. 이것은 미국에 국한되지 않는 세계적 현상이지만 대부분의 세계적 영향력을 갖는 IT기업들이 미국 기업들이기 때문에 SNS 여론은 미국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여덜 번 째, 미국의 문화전쟁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민주당의 정치적 스펙트럼은 상당히 다양하다. 전통적으로 리버럴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연원은 모두 ‘뉴딜’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현재 민주당의 정치地形(지형)에서 리버럴은 상당히 오른쪽에 가 있고 버니 샌더스, 자칭 포카혼타스의 후예라 주장했던 엘리자베스 워런, 히스패닉 정치인 오카시오 코르테스 등이 극좌에 위치하는 등 그 정치적 스펙트럼이 넓다. 반면, 공화당은 민주당의 동성애, 이민, 난민, 낙태 등과 같이 리버럴한 주장에 반대되는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의 정치 진영으로 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미국의 自由主義(자유주의)는 현재 시점까지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건국 부터 남북전쟁을 거쳐 뉴딜 시대 이전까지는 고전적 의미에서의 자유주의(Classical Liberalism)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뉴딜 이후 민주당의 정치를 통상 리버럴이라고 부른다. 빌 클린턴은 레이건의 신자유주의를 그대로 차용한다. 따라서 빌클린턴 이후 트럼프가 출현하기 전까지 이 시기는 공화당, 민주당 모두 신자유주의의 旗幟(기치)를 내걸게 된다.

아홉번 째, 미국의 사법부는 상당히 정치적이다. 최근 박근혜의 탄핵 이후 한국의 사법부의 정치적 편향성이 심화(사실, 이건 편향성이 아니라 법치가 무너지고 있다고 보인다)되고 있지만 그 이전까지 사법부는 적어도 명목상 정치적인 중립지대였다. 하지만, 미국은 애초부터 판사들이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등 정치적 영역에 깊숙히 들어가 있었다. 특히, 대통령의 임기 중 대법관을 임명하는 것은 각 정당의 정치적 어젠다가 대통령의 퇴임 이후에도 미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대법관의 종신 임기까지 계속 투영되는 정치적 중요성을 갖는다.

열 번 째, 미국 정치가 양극단으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유를 저자는 뉴딜 이래 민주당 우세 경향에서 점차 세력 균형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오히려 한 쪽이 일방적일 때는 적절한 타협과 조정이 가능했지만 비슷한 힘이 부딪힐 때 그 갈등의 수위가 높아진다는 해석이다. 최근의 한국 정치상황 역시 이런 맥락에서 설명한다면 일정 부분 수긍이 간다. 아무튼, 한국 사회에 미치는 미국의 영향력은 크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적 상식은 유럽에 치우쳐 있고 미국에 대해서는 의외로 그 지식이 부족하다.

미국이 독립선언을 하고 약 250년의 시간이 흘렀다. 최근의 미국정치에서 Established Power 또는 Deep State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뉴딜 이후 민주당이 의회의 지배적 권력이 되면서 일종의 ‘귀족’과 같은 계급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미국 정치의 현실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들이 상당히 현실과 괴리된 채 상당히 이질적인 판단과 행동을 보인다고 느낄 때가 있다.당분간, 미국을 대체할 수 있는 나라는 없어 보이지만, 미국에서의 경험을 반추할 때마다 느껴지는 불편함 또한 부정할 수가 없다.

미국이라는 보편성은 상대적이고 역사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세계경영은 우연적Accidental이었다. 미국 자체의 역사적 전개과정의 우연적 발현이었다고 봐야만 한다. 그들을 흠숭하고 경애할 필요도 없지만 마찬가지로 그들을 맹목적으로 비난하고 손가락질 할 일도 아닌 것 같다.

한국은 분단으로 인해 ‘섬’과 같이 고립된 나라이기 때문에 세계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은 제한적이고 偏狹(편협)해질 때가 많다. 미국을 대상으로 한 객관적 연구가 좀 더 많아졌으면 좋겠고 그를 통해 대중들을 설득하고 이해시켰으면 좋겠다.

미국 정치 또는 정치제도를 너무 간략 또는 단순화 시켜 설명하는 것에 아쉬움이 남는 것은 이런 종류 입문서의 피할 수 없는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또다른 양서를 기다려야만 할 것 같다.